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36~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이 말씀을 거의 자동적으로 이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참된 이웃을 보여 주십니다.이젠 이젠
노마드란 본래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유목민을 곳마다. 현대에 와서는 고정된 체계와 네 네 사상적 단순화된 밖에 아 사상적 단순화된 사상적 단사용됩니다. 인간은 난 난이제 끊임없이이제 나고 싶어 끊임받아들이는 없이끊임없이. 국가, 우리는, 사상, 관계, 심지어 종교까지도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억압으로 느껴지면 다른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이
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떠나면서도 결국 다시 그래서 것을 받아들이는
성경은 이 인간사의 아 우르, 곧 바벨론의 전신에서 출발합니다아브라들이 만든 나아갑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짜로 떠나지 못하는 나라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나라로 자기 자신이라는 왕국입니다. 아무리 탈영토화, 탈국가화를 외쳐도 인간은 결국 자기 유익, 자기 영광, 자기 의를 중심으로 한 나라로 귀환합니다. 이 나라에서 왕은 언제나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종류의 노마드를 말합니다. 스스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끌려 나오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자발적 탈주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의 옛 나라, 곧 옛 사람을 계속해서 무너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심장에 하나님의 칼이 꽂히고, 그 왕국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늘 나그네인 것입니다. 정착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착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참된 노마드의 삶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모리아산, 자기 나라가 무너지는 자리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팔던 집안, 갈대아 우르라는 바벨론 체계 속에서 살던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아브라함의 가능성을 키워 주는 방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무능과 실패를 끝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모리아산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십니다. 약속의 후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 앞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소망과 자기 이해는 붕괴됩니다.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사람은 사실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준비하신 제물로 그 자리를 대신하십니다. 모리아산 사건은 인간의 결단을 칭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인간의 행함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을 읽으면, 마치 로마서 4장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고,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인간이 만들어 낸 도덕적 성취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에 접붙여진 결과로서의 행함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하시고, 그 은혜가 사람 안에서 드러난 흔적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끝에 등장하는 인물이 라합입니다. 가나안 여인, 창녀, 저주받은 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구원의 가장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라합을 통해 구원의 시나리오를 완성하십니다. 라합의 행함은 도덕적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나라를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들어갑니다. 은혜는 언제나 밖에 있던 자를 안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은 철저히 무너집니다.
이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율법사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 율법과 행위로 자신을 살리려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사마리아인, 유대인들에게 원수와도 같은 이방인인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이웃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원수의 땅에 들어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얻는 보상이 아니라, 선한 이웃이신 예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너도 착한 사람이 되어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들려옵니다. “너도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오라.” “너도 강도 만난 자의 자리에서, 선한 이웃이신 나의 사랑을 받으라.” 그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이 됩니다. 그 은혜에 붙들린 자만이, 흘려보내는 사람이 됩니다.
성도의 삶은 점점 더 거반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 힘이 빠지고, 자기 의가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붙드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비로소 영생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이웃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한 이웃이신 예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진짜 노마드로 이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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