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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중요한 성경적인 가르침 - 은혜와 율법의 구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3.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로마서 7:6)

신앙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
내가 과연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흔들립니다. 예배를 빠지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기도가 줄어들면 하나님과 멀어진 것 같으며, 어떤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불안의 뿌리는 대개 하나입니다. 은혜와 율법을 구분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구원을 여전히 ‘
율법의 영역’ 안에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으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의 언어는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
네가 이것을 하면 살 것이다.” “네가 기준에 이르면 인정받을 것이다.” 반면 은혜의 언어는 전혀 다릅니다. “이미 살게 되었다.” “이미 받아들여졌다.” “이미 이루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율법은 행위가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결과가 먼저이고 행위는 그 뒤를 따릅니다.

만일 구원이 율법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게 됩니다. 오늘 내가 얼마나 잘했는가, 얼마나 성실했는가, 얼마나 죄를 이겼는가에 따라 구원의 확신은 오르락내리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자유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 비교, 그리고 두려움의 굴레가 됩니다.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이번 시험에서 전 과목 A를 맞아오면 너를 내 아들로 인정하겠다.” 이 아이는 매 시험 기간마다 극심한 불안에 시달릴 것입니다. 혹시 한 과목이라도 실수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잃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에게 ‘아버지’는 위로의 존재가 아니라 평가자이며 심판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
너는 이미 내 아들이다. 성적과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다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답게 자라기를 바란다.” 이 아이는 다릅니다. 실패해도 돌아갈 집이 있고, 넘어져도 품어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공부의 동기가 됩니다. 정체성이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늘 성적표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이미 ‘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구원은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분의 어떠하심’인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상태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상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은혜에 속한 것이라면, 그 근거는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셨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지, “이제 너희가 잘 해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유지하는 것은 내 몫이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 위에 율법을 덧씌운 신앙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은 조건이 아닙니다. 선물은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엄청난 빚을 졌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하루하루를 빚 독촉에 시달리며 삽니다. 숨 쉬는 것조차 죄책감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채권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
네 빚은 전부 탕감되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일 수 있습니다.

첫째, 믿지 못하고 여전히 빚을 갚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둘째, 탕감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첫 번째 반응에 머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빚이 탕감되었는데도, 여전히 스스로 갚으려 애씁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믿지 못한 채 율법으로 돌아가는 신앙인 것입니다.

은혜는 방종이 아니라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
은혜만 강조하면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방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겉모습을 고치려 하지만, 은혜는 사람 자체를 새롭게 합니다. 율법은 외부에서 채찍질하지만, 은혜는 내부에서 생명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는 순종은 억지가 아니라 감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복음 이해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복음을 율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다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
나는 지금 은혜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율법 앞에 서 있는가?” 구원은 내가 오늘 얼마나 잘 살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그분이 이미 이루신 완전한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

이 진리를 붙들 때, 비로소 신앙은 두려움에서 자유로 옮겨지고, 노력에서 안식으로 옮겨지며, 자기 증명에서 감사의 삶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은혜와 율법의 구분,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태어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