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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언약 - 약속을 기다리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4.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라디아서 4:28)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믿음으로만 반응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모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씨와 땅, 그리고 그를 통해 복을 얻게 될 민족들까지 말입니다. 이 언약은 조건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횃불이 되어 쪼갠 제물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그 성취의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지신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입니다. 약속은 분명한데,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계산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마침내 사라가 말합니다. “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이 말은 단순한 가족 문제의 제안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니, 우리가 대신 방법을 찾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신앙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기다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 태어난 사람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당시 문화에서는 충분히 용인되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마엘이 약속에서 난 자가 아니라, 육체로 만들어진 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믿음은 늘 ‘
대안’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스마엘은 늘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경제는 불안하고, 자녀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교회의 미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며듭니다.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요즘 시대에는 이 정도 전략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은 좀 달라도 괜찮지 않을까?

이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방법을 추가합니다. 기도는 유지하지만, 중심은 점점 계산으로 옮겨갑니다. 말씀은 붙들지만, 결정은 여론과 통계가 좌우합니다. 이스마엘은 이렇게 태어납니다. 기도 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기다림으로 연결하지 못할 때 태어납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
이레 동안 기다리라.” 그러나 사울은 기다리는 동안 눈앞의 현실을 봅니다. 백성은 흩어지고, 적은 몰려오고, 지도자로서의 불안은 점점 커집니다. 그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려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문제는 순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과 시간을 무시한 채, 자신이 보기에 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사울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
부득이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득이함’은 불순종의 면죄부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사무엘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한 그 한 번의 선택이 사울의 왕국 전체를 무너뜨리는 시작이 됩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성도에게도 이스마엘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능력을 인간적으로 만들어내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미련해 보입니다. 십자가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포장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게, 부담 없게, 선택하기 쉽게 바꿉니다. 전도 방법은 점점 정교해지고, 프로그램은 점점 화려해집니다. 그러나 정작 말씀과 기도는 점점 뒤로 밀려납니다.

이 모습은 백성을 붙들기 위해 제사를 드린 사울과 닮아 있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과 닮아 있습니다. 문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끝까지 믿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가장 신실했을 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든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을 때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몸이 죽은 것과 같아졌을 때, 이제는 더 이상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약속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내 열심이 죽고, 내 방법이 끝나고, 내 가능성이 포기되는 자리, 십자가는 무엇을 더 얹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위적인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육체로 난 자가 아니라 약속으로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교회 안에서 이스마엘을 계속 키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프고 힘들더라도,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자리가 고통스러워 보여도, 그 자리가 결국 참된 자유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십자가 앞에서 묻습니다. 나는 지금 기다림의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는가, 모든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다시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