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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빌립보서 -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6.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립보서 1:27~28)

사람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습관처럼 “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눕니다. 그 말 속에는 건강, 성공, 평안, 형통 같은 세상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 우리도 별다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기대하는 복의 내용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
좋은 소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표현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삶이 조금 나아지는 소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는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으며,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선언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복음은 성도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인간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완전한 무능과 죽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하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호적이 바뀐 사건입니다. 혈과 육에 속한 세상의 호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양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한다. “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이 말은 현실 도피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우리의 소속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공 앞에서도 들뜨지 않고, 실패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회사가 어려워져 구조조정 명단에 이름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인생의 큰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질문이 다릅니다. “
이 상황 속에서 주님은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가?” 이 질문은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지만, 고통의 의미를 바꿉니다.

빌립보서는 “
생활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각주로 ‘시민 노릇하라’고 설명합니다. 빌립보는 로마 시민권을 자랑하던 도시였습니다. 은퇴한 로마 군인들이 살며, 로마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런 도시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의 시민권은 로마가 아니라 하늘에 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한복판에서 다른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더 높아지려 할 때 낮아짐을 선택하고, 모두가 강함을 말할 때 약함을 말하며, 모두가 이익을 계산할 때 손해를 감수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삶은 언제나 충돌을 낳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면 반드시 대적자가 생깁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구원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하늘 시민들로 이루어진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빌립보 교회 역시 복음을 위해 헌신했고, 바울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다툼은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이단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
누가 더 잘 섬기느냐”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생긴 갈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순히 “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 마음, 한 뜻”을 말하면서 그 의미를 한 성령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적인 타협이나 감정 조절로 되는 연합이 아니라, 복음 앞에서 자신이 죽는 연합입니다. 교회 안의 갈등은 종종 복음보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앞설 때 생깁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은 은혜이고, 고난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어려움이 오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도 은혜고, 고난도 은혜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왜 고난이 은혜인가? 그것은 고난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
내가 주인 되려는 마음’을 꺾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질 때 부모를 더 꼭 붙잡듯, 성도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 실제로 붙듭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어 있게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할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우리는 가장 쉽게 잠듭니다. 반대로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주님의 날을 더 간절히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만큼의 고난을 통해, 하늘 시민답게 살도록 우리를 깨우십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특별한 영웅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기억하고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는지를 점검하고 복음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는 삶입니다. 믿음만 은혜가 아닙니다. 고난도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혜는 우리를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는 하나의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땅의 시민으로 살 것인가, 하늘의 시민으로 살 것인가, 복음에 합당한 삶은, 그 질문 앞에서 날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