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대답이 이해에서 나온 고백인가, 아니면 외워서 말하는 정답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학생이 수학 문제를 풀 때, 풀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참고서의 답만 외워서 적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험에서는 정답을 맞힐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가 조금만 바뀌어도 손을 들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문제를 ‘안 것’이 아니라, 답을 외웠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 “은혜”, “구원”이라는 정답을 너무도 정확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내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암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내 삶을 지키려는 모든 시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예수를 찾는 이유가 내 삶이 흔들릴 때 버팀목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붙드는 이유가 내 소망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을 도와주는 장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빼앗는 사건입니다. 나뭇잎 하나가 시냇물에 떨어지면, 그 잎은 더 이상 방향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물살이 이끄는 대로 흘러갈 뿐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내 삶이 더 이상 ‘내 계획’과 ‘내 계산’이 아니라,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는 “이렇게 살게 해달라",“이것만은 지켜달라”는 말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요구가 여전히 크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아직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세례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관심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더 이상 나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따지며 나뉘었습니다. 바울에게 받은 세례, 아볼로에게 받은 세례, 게바에게 받은 세례가 마치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이는 세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세례는 사람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나에게서 예수께로 관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누구 편이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를 말한다면, 그 사람의 관심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책망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이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십자가는 왜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일까요? 노아를 떠올려 봅시다. 비가 오지 않는 땅에서, 홍수를 대비해 배를 만드는 노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어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현실을 좀 보라.” 노아 자신도 수없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을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방주는 평소에는 아무 가치가 없어 보였지만, 심판이 임하자 그 가치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방주는 심판 앞에서만 ‘능력’이었습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심판을 모르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무능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우리가 은근히 바라는 구원 방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구원도 받는 것.” “노력도 인정받고, 은혜도 받는 것.”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그 모든 계산을 무너뜨립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 구원은 심판에서 건져짐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모든 인간의 의와 공로를 무너뜨리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성도는 목사의 사람도 아니고, 교회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특정 인물에게 인정받기 위해 움직이고, 그의 이름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십자가가 증거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 모두를 한자리에 세웁니다. “예수의 피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사람.” 이 사실 앞에서는 누구도 더 높을 수 없고, 누구도 더 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은혜 안에서는 분쟁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분쟁이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아직 “나는 옳다”, “나는 낫다”,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 변호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 모든 변호를 침묵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나를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내가 더 이상 중심이 아닌 삶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이고, 구원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정답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의 근거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에 대한 정답을 외우고 있는가, 십자가가 정말 내 삶의 토대라면, 나는 더 이상 나를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생명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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