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7~10)
우리는 종종 ‘구원’을 생각할 때, 삶이 조금 더 나아지는 것, 형편이 풀리는 것, 혹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 정도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구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여기서 바울은 ‘구속’을 설명하면서 굳이 “곧 죄 사함”이라고 덧붙입니다. 구속은 사실 죄 사함보다 훨씬 크고 넓은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죄의 자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존재가 죄 사함을 통해 화목하게 되는 것, 그 출발점이 바로 죄 사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이란 형통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 하나님의 편에 선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구속은 한 가지 중요한 수식어를 달고 있습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원은 인색한 은혜의 결과가 아닙니다. 마지못해 베푸신 긍휼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넘치고 남는 긍휼에서 흘러나온 사랑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풍성함’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고, 동시에 불필요한 두려움 속에 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늘 불안합니다. 혹시 버림받지는 않을까, 이 정도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실망하시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기대에 부응하면 사랑이 지속되지만, 기대가 무너지면 그 사랑은 쉽게 분노와 저주로 바뀝니다. 사랑한 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자연계마저 함께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이 완성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왜 즉시 버리지 않으셨을까요? 답은 단순히 “사랑하셔서”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늘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사랑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깊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결코 진노로 되돌아가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미 진노를 통과했고, 십자가에서 그 진노를 다 쏟아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심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자주 빠지는 딜레마는 이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도 정말 구원받은 걸까?” “이렇게 자주 넘어지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붙드실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돼지 먹는 쥐엄열매조차 얻지 못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아들의 회개가 그 보상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우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는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받은 것을 언젠가 갚아야 할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주실수록 오히려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지만, 그 경외는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공포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경외이며, 아버지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안다면,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에 목숨 걸지 않게 됩니다. 아이가 오백원의 동전에 집착하는 것은 오만원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만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동전에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이 땅의 형통과 성공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것을 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녀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숙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풍성한 은혜를 아는 자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나타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는 어떤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구원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성소 밖에 서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늘 함께 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아는 자는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종말을 바라보며 삽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살았고, 그 심판을 선포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 약속은 결코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 풍성한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자라면,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묵상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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