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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빌립보서 -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3.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18~21)

본문에서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말씀은 단순한 결단이나 의지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점령하셨을 때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생존이나 명예, 억울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힘든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조금 더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받고,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안심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대 속에서 신앙은 어느새 종교 서비스가 됩니다. 목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종교 전문가가 되고, 교회는 삶을 견디기 위한 안전한 쉼터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
내가’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는 것을 소망합니다. 성경은 결코 “네가 잘 되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를 이 땅에 붙들어 매는 모든 것들로부터 떼어내어, 위의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참된 목회의 일은 사람을 이 땅에 더 잘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스텐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교회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버스 운전사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친절할 뿐, 사람들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가야 할 길, 세상이 모두 “
”라고 말할 때 홀로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길,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은 제자들조차 말렸던 길, 패배처럼 보였던 길, 그러나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시기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까지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바울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는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또 하나의 이유로 기뻐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 동시에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참여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관계 안에 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삶의 방향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타락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오래 살려고 애쓰고, 죽음을 잊기 위해 쾌락과 성공에 집착합니다. 히브리서 2장은 인간이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를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평생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멸하신 이유는, 우리를 이 종노릇에서 해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 너머에 있는 완전한 구원, 곧 몸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단 하나입니다. “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복음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말은 내가 예수님을 조금 의지하며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고백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처럼, 이제 나는 나를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인생을 붙들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
죽는 것도 유익하다.

로마서 1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은 훈련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결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은혜로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이 길에서 놓치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오늘도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