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사도행전 6:1~4)
옛날 한 마을에 정직하기로 소문난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저녁 작은 공책에 그날 한 선행을 적었습니다. "이웃집 담장을 고쳐줌", "과부에게 땔감을 나눠줌", "거짓말하지 않음." 몇 년이 지나자 공책은 두꺼워졌고, 그는 그 공책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설 날을 기다렸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이만큼 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매일 그걸 적으세요?" 목수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상을 주실 때 참고하시라고." 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상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으면요?" 목수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해 선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행전 6장의 예루살렘 교회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소외되자 히브리파를 원망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도들은 그 다툼의 표면 아래 있는 진짜 문제를 짚어냈습니다. 구제 물자가 모자란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비교하며 "내 몫", "내 공로", "내가 받아야 할 것"을 계산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의 해법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힘쓰겠다"고 했는데, 성경 원문의 순서는 기도가 먼저입니다. 왜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천국에 등수가 있다면 그것이 정말 천국일까요? 어떤 이는 백 달란트를 받고 어떤 이는 열 달란트를 받아, 서로를 곁눈질하며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적게 받았지" 하고 마음 상해한다면, 그곳이 정말 완전한 안식의 자리일까요? 완전한 만족이 있는 곳에서는 '더 받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습니다. 이미 가득 찬 잔에 물을 더 붓는다고 그 잔이 더 채워지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성도가 받은 상은 오직 하나, 영생입니다. 그런데 영생이란 내가 무엇을 더 소유하게 되는 사건이 아니라, 내가 완전히 비워짐으로써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상을 더 주세요"라는 기도는 사실 "저는 아직 완전히 비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몫을 좀 남겨주세요"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목수의 공책처럼, 선행을 계산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은혜의 자리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복음의 오래된 수수께끼 하나를 짚어보면,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14대, 포로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정리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명단을 세어보면 마지막 단락이 13대로, 숫자가 맞지 않습니다. 왜 하필 다윗의 이름 근처에서 이런 어긋남이 생길까요? 답은 마태복음 1장 6절 한 구절에 숨어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밧세바라는 이름은 아예 지워지고, 그 자리에 "우리야의 아내"라는 표현과 함께 죽은 남편 우리야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밧세바에게는 남편이 둘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야와 다윗. 그런데 성경은 아이의 아버지를 다윗이라 명시하는 대신, 죽은 우리야를 다시 불러냅니다. 마치 법정에서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판가름하듯이 말입니다.
사무엘하 12장을 펼쳐보면 그 뜻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낳은 첫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이는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꺾인 것은 다윗이 아니라 우리야였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값을 우리야가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오래된 패턴과 겹쳐집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아벨의 빈자리에 셋을 세우셨습니다. 죽은 아들의 자리에 새로운 아들이 들어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를 죽였을 때, 그 죽음의 자리에서 교회라는 새로운 백성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으로 보면, 솔로몬은(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아들)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야와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율법의 성취를 상징하는 '다윗'은 그 계보에서 조용히 지워집니다. 그래서 족보의 숫자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원하던 화려한 다윗 왕국의 왕은, 내 아들의 족보 안에서 설 자리가 없다."
이 족보에는 또 하나의 낯선 특징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 다섯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유대 사회에서 흠으로 여겨질 만한 사연을 지닌 이들입니다. 시아버지와의 관계로 아이를 얻은 여인, 이방 땅 여리고의 창기, 저주받은 모압 출신의 과부, 불륜으로 얼룩진 왕의 아내, 그리고 결혼 전에 잉태한 처녀, 만약 어느 귀족 가문이 족보를 편찬하면서 일부러 이런 이름들을 새겨 넣는다면, 그것은 자기 가문의 수치를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냅니다.
왜인가요?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자기 힘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신실하게 응답한 이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부정하고 연약해 보였던 그 자리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반면 족보 속 남자들의 이름은 힘과 업적으로 기록되지만, 정작 계보를 이어가는 결정적 순간마다 하나님은 남자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여인들을 통해 새 길을 여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오래된 약속(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이 이렇게 성취됩니다. 메시아는 힘 있는 남자의 계보가 아니라, 연약하고 낮아진 여인의 계보를 통해 오십니다.
이것이 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교회를 향한 성경의 비유는 자주 신부, 곧 여자로 그려집니다. 이는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자기 힘과 의로 하나님과 협상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다 내려놓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자리입니다.
콜리 텐 붐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언니를 잃고 살아남은 뒤, 훗날 자신을 고문했던 간수를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회개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텐 붐은 그 순간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분노와 정당한 권리 주장(나는 이만큼 고통받았으니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계산)을 내려놓아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힘으로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고, 오직 성령이 자기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부인되는 자리입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할 모든 근거를 손에서 놓아버리는 자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죄인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정죄받아 마땅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 자리로 내려가심으로써, 구원이 우리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전적인 은혜임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왜 말씀 전하기에 앞서 기도를 앞세웠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논리나 도덕적 설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가장 싫어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목수가 자신의 공책을 계속 채워가는 삶은 어떤 면에서 쉽습니다. 그러나 그 공책을 불태우고, "나는 아무 공로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서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은 훨씬 힘듭니다. 힘과 의로 사는 삶(세상이 존경하고 박수를 보내는 삶)은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낮아지고, 계속해서 내려놓고, 마침내 그리스도만 드러나도록 자기를 지워가는 삶은 죽기보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 눈물이 자기 연민인 억울함, 손해, 잃어버린 것에 대한 눈물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를 붙들고 있는 자신의 연약함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합니다. 그런 눈물이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목수처럼 공책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계산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주의 은혜로만 여기 서 있습니다." 그 자리, 다 내려놓은 그 낮은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사도행전 6장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회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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