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라."(사도행전 6:1~4)
새벽 다섯 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골목을 한 노인이 걷고 있었습니다. 걸음은 비틀거렸고, 옷깃에서는 늘 술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교회에 도착해 자리에 앉으면 주변 사람들은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습니다. 알콜을 끊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새벽길을 걸어왔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그는 여느 때처럼 얼큰히 취한 얼굴로 예배당을 나서며 목회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저 같은 것도 사랑하시네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며칠 뒤 그는 길에서 넘어져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을 끝까지 붙들고 살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놀라워했습니다. 담배를 끊고 술을 끊는 것이 신앙의 훈장이 아닙니다. 참된 성화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고,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교회, 그 뜨거웠던 부흥의 현장에서도 다툼은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소외된다며 히브리파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사소한 다툼입니다. 과부는 과부일 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자기 편, 자기 무리를 먼저 챙기고 싶어 합니다.
이 습성은 지금도 우리 안에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을 떠올려보십시오. 평소에는 축구에 별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그 순간만큼은 같은 색 옷을 맞춰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한 골이 터지면 처음 보는 사람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 열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국가와 민족에 투영시키며 스스로가 승리한 것처럼 도취됩니다.
그러나 그 열기가 가라앉으면, 우리는 또다시 크고 작은 편을 만들어 서로를 밀어냅니다. 지역으로, 세대로, 이념으로, 이것이 인간의 오래된 습성입니다. 외부에 공동의 적이 있을 때는 뭉치지만, 평온해지면 다시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존재, 그것이 우리입니다.
사도들은 이 다툼 앞에서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뛰어들지 않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선언하며, 구제의 일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에게 맡깁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더 깊이 나아가는 것뿐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한 유명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무소유라는 개념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정성껏 기르던 난초 화분 앞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난이 너무 사랑스러워 물을 주고 볕을 쬐어주며 애지중지하던 중, 문득 자신이 그 난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결국 그 난을 친구에게 주어버렸고, 그 순간 비로소 해방과 자유를 느꼈다고 적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그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면, 그 난을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버리지 않고 남에게 주었습니다. 자신의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 그 집착의 대상을 친구에게 떠넘긴 셈입니다. 진짜 무소유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소유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또 다른 욕구를 채운 것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매달 상당한 인세가 들어왔습니다. 원하면 언제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고, 필요하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인도의 한 수녀회는 여러 대의 자가용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세계 각지로 날아갈 수 있는 형편이라면,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과연 진짜 무소유일까요?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소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무소유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결국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정의로 후퇴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가진 것은 다 필요해서 가진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소유란 실천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비추는 거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내려놓음'의 서사에 열광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묘함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무언가를 버리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영광은 조금도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개미가 들어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개미들은 나름의 질서를 지키며 줄지어 다닙니다. 서로 부딪히지 않고, 각자 맡은 일을 하며, 심지어 자기들끼리 청소도 합니다. 그러나 집주인의 눈에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질서정연하게 움직여도, 그 존재 자체가 문제입니다. 집주인이 원하는 것은 개미들이 얼마나 예의 바르게 줄을 서는가가 아니라, 그 개미떼가 집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다소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도덕과 질서, 정의를 내세워도,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은 본질을 바꾸지 못합니다. 창세기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생기가 없는 인간은 그저 흙,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 비로소 생령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개미떼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그 개미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무리 가운데서 골라내어 살리셨다는 것, 그 자각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까." 이 고백이 나올 때,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화목이 시작됩니다.
축구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공은 선수의 발이 차는 대로 날아갑니다. 공이 스스로 "나는 이쪽으로 가고 싶다"고 결정하는 순간, 경기는 무너집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어울리셨습니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는 비난까지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비난에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분의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도덕적 판단,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는 이분법은 사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이 갖게 된 습성입니다. 남을 재판하고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붙드는 자리에 서는 것, 그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의 시련이라 하면 극심한 박해나 고난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은 인간이 의외로 잘 견뎌냅니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을 때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살려달라 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찬양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바울이 정작 이렇게 탄식한 순간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는 외부의 고난이 아니라, 자기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와의 싸움 앞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에 이끌리는 자신의 모습, 그 내면의 전쟁이야말로 참으로 견디기 힘든 환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삶 속에서 수없이 흔들립니다. 이것은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계속 성경으로 돌아가 "나는 어떻게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신뢰를 키워갑니다. 그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알콜중독 노인이 남긴 마지막 고백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하나님이 저 같은 것도 사랑하시네요." 그는 평생 자신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 연약함을 정확히 알았고, 그럼에도 자신을 붙드시는 은혜 앞에서 진심으로 놀라워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신앙의 자리입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다툼도, 무소유를 향한 인간의 허영도, 개미떼처럼 질서를 자랑하는 우리의 모습도, 결국 하나의 진실 앞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스스로 서 있을 수 없는 죽은 흙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진실입니다. 그 은혜를 붙들고 다시 오늘의 새벽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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