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사도행전 6:7)
역사에는 가끔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한 문장의 무게를 느끼려면, 예루살렘이 어떤 곳이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주의의 심장이었습니다. 절기마다 이 작은 성, 모리아산 위에 세워진, 오늘날 웬만한 읍 하나보다 작은 그 성에 남자만 200만 명 가까이 몰려들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메카의 순례 인파와도 견줄 만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몰려들었을까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정점에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유대주의의 상징 그 자체, 율법을 숭앙하고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바로 그 제사장의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바티칸 심장부의 추기경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소식과 같은 무게를 가진 사건입니다.
무엇이 이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렸을까요? 칼도 아니었고, 논쟁도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답이 오직 말씀뿐임을 알았고, 그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말씀은 논리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깨달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와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이, 200만 명이 몰려들던 열심의 도시를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기 위해, 잠시 옛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은 아무리 조심해도 입에서 시기와 질투와 거짓이 새어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남을 험담하지 않으려 다짐해도, 대화가 길어지면 어느새 누군가를 흉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당시 어떤 이들은 이 죄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겠다며, 마취제도 없이 바늘로 자신의 입술을 꿰매버렸다고 합니다. 겨우 죽 한 숟갈 빨아 넘길 만큼의 틈만 남기고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사람들 틈에 있으면 자꾸 음욕과 탐심이 일어난다며, 30미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30년을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찾아와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마음속에 스며드는 어두운 생각을 피하기 위해,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스스로를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면, 조금 더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알프스의 한 수도원 이야기입니다. 만년설이 뒤덮인 그곳에서 수도사들은 밀가루 포대 같은 얇은 통옷 하나만 입고 지냈습니다. 겨울에도 그 옷 하나로 자고, 그 옷 하나로 묵상하고, 그 옷 하나로 밥을 먹었습니다. 아래로 숭숭 들어오는 바람을 견디며,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침묵 속에 보내고 수시로 자기 몸을 때리며 참회했습니다. 90세가 넘은 한 노인은 이미 인쇄된 성경이 버젓이 있는데도, 평생을 히브리어 성경 필사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 수도원에 방문한 사람은 처음엔 이 헌신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러나 며칠을 지내며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곳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들의 눈은 퀭하게 굶주려 있었고, 낮에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노동해야 했으며, 끊임없이 "제 탓입니다, 제 탓입니다"를 되뇌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은 마귀가 사는 곳이 아닐까?' 즐거움 없는 종교, 그것이 인본주의의 얼굴이었습니다. 인본주의란 무엇입니까? 내가 무언가를 해냄으로써 구원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입술을 꿰매서, 기둥 위에서, 필사를 통해, 나는 하나님 앞에 내밀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몸부림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도덕과 율법을 지켜온 제사장들이, 제자들이 전한 말씀 앞에 복종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전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와 은혜입니다. 유대주의는 인간의 행위가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을 이끌어내는 가치 있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정반대였습니다. "너희의 그 열심은 근거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그분이 흘리신 피의 공로만이 근거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하라"는 외침의 진짜 무게를 이해해야 합니다. 회개는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매일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너희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그 길, 그 길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도 똑같이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마리아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보내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 유대인에게만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다른 누구보다 먼저 이 유대주의 자체와 담판을 지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무너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유대주의는 특정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 안에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기로 결정한 모든 죄인의 상징입니다. 그 죄인들에게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안 된다." 이 말이 자존심을 뭉갰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전한 이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죄"라는 단어는 자주 오해받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만 죄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마치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깨끗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선악의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정하는 것, "당신이 하나님이시라 해도, 그 명령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판단해버리는 것, 이해되지 않는 성경 구절을 조용히 걷어내는 것, 이것이 오늘날 신학과 신앙 안에도 스며 있는 죄의 얼굴입니다. 교회가 민주적 절차를 갖추고, 시대와 발맞추고, 이해하기 쉬운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수결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나머지 모두가 복종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방향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일 수 없습니다. 다수가 가라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깊이 알수록 우리는 오히려 서글픈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택하신 백성은 생각보다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은혜가 한순간이라도 떠나면 얼마나 빨리 나락으로 떨어지는지를 인정하는 그 자리, 그때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덮쳐 들어오시는 것을 복음이라 부릅니다.
이 진리를 신학자보다 더 정확히 통찰한 이들이 있습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혁명 세력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사면되어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는 그 길에서 그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 그의 작품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 작품들 속에는 어떤 설교집보다 깊은 복음의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800년쯤 지난 어느 날, 그분이 다시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도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의 도면을 보여주시며 "네가 본 대로 지으라" 하셨습니다. 성막과 율법과 제사는 원래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것을 1500년 후에 부수러 오셔야 했을까요? 인간은 끊임없이 순수했던 원형을 자기 편한 대로 덧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보여주신 원형조차, 인간의 손을 거치면 인본주의로 얼룩집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다시 1800년이 지난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자랑스레 내미는 봉사와 헌금과 열심의 목록을 보시고 이렇게 물으실지 모릅니다. "언제부터 이것이 다시 구원의 근거가 되었느냐. 너희는 나를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으로 왔다."
십자가 옆의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전혀 도울 수 없는, 벌거벗겨진 채 못 박힌 예수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성경은 그를 "강도"라 부릅니다. 강도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명분과 부귀와 영광을 위해 산 자, 자기가 삶의 중심이 되어 필요하면 무엇이든,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밀어내는 자입니다. 그런 그가 죽음 직전에 고백합니다. "면목없지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제 이름을 기억해 주소서." 아무것도 내밀 것 없는 사람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예수께 자신을 맡긴 그 순간, 그것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희석시켜 부흥을 산다." 복음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면 결코 사람이 몰려들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을 알아본 이는 소설가라 할지라도 이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봅니다. 톨스토이의 말년 단편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작품들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시받곤 하지만, 그 안에는 신앙인이 홀로 짊어졌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진리는 서재에서만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가장 아픈 자리에서 배워집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신학교 시절 좋은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한 분은 사업을 크게 하시는 장로님이었고, 목사님은 그분을 신앙의 아버지처럼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분이 한국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상대에게 약점을 잡혔고, 목사님에게 정치인을 소개시켜 그 사람을 밟아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목사님께서 거절하며 "그 일에 개입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린 순간부터, 그분은 목사님을 향해 모함을 시작했습니다. 존경하던 분이 그렇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철거민촌 아이들을 위해 세운 작은 보육 시설이 있었습니다.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지켜온 그곳의 회계를, 목사님은 가장 신뢰하던 제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42명의 아이들을 살릴 돈을 모두 써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참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거룩을 위해 허락하신 시련이겠지"라고 되뇌며 그를 품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다시 큰돈을 빌려달라 찾아왔을 때도, 목사님은 그를 격려하고 주례까지 서주고 신혼여행 경비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깨달은 것은,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가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속에서 왜 이렇게 진심으로 용서가 되지 않는가? 그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미움을 녹여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누구든 언제든 그 사람을 찾아가 해치고도 남을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붙드실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코리 텐 붐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녀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자매를 잃었고,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을 학대했던 간수와 마주쳤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주님, 제 손을 들어 올려주십시오"라는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팔이 저절로 올라가 그 손을 잡았다고 그녀는 회고합니다. 용서는 인간의 결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녀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우리의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가 참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참은 것이 아니라 벼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벼르고 벼르다 결국 더 크게 터지고 맙니다. 진짜 용서는 내 결심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가 내 안에 들어와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뿌리에는 자기 확인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목사님은 스스로를 지키려 무던히 애썼습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곁눈질하지 않으려 벽을 보고 서서 기도했고, 신학생 시절 성도들이 아이 밥값이라며 손에 쥐어준 돈을 몰래 되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돌아보니, 그 마음의 실체는 순전한 헌신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바르다"는 자기 이미지를 지키려는 욕심이었습니다.
어느 분께서 새 차를 샀을 때 이야기입니다. 매일같이 왁스로 광을 내며 애지중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차 옆면을 길게 긁고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몇 번을 더 긁히고 나니 나중에는 아무렇게나 세워두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흠집 하나에 그토록 분노했던 것은, 그 차를 "완벽한 것"으로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새 차처럼 포장하고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음 자리는 흙이었습니다. 토기장이가 무엇을 빚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삶 전체를 이미 그분께 내어드린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마귀의 도구로 끌려가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붙들려 쓰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사울도, 심지어 발람의 나귀도 하나님께 쓰였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을 때 그 존재는 가치와 선을 나타내지만, 은혜가 떠나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다시 원래의 자리인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질문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가,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없이 얼마나 무너질 존재이며,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붙드셨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우리 삶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불로 태워진다고 말합니다. 태워지고 남는 것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죽어라 애써온 것이 하나도 근거로 인정받지 못하니 부끄럽고, 오히려 손해로 여겨집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지어온 예복을 입고 잔치에 가면, 그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당신의 선행과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 앞에서 점수로 매겨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스스로의 악함이 드러날 때 억지로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그 폭로 앞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고통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느껴지는 고통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편할 것 같지만, 성령이 계신 자는 그 길에서 오히려 아파합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몸, 그리고 그날 완전히 사라질 고통입니다. 신앙은 삶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하고 인격을 갈고닦는 자기계발의 여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 예수께 나 자신과 내 자녀들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그 열심의 자리에서 내려와 복종한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곳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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