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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사도행전 - 하나님의 가구, 하나님의 자녀, 무력함의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8.

사도행전 6장 7~10절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리버디노 사람도 있고 구레네 사람도 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사람,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소 열 개 나라 이상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들이 한 지붕 아래 앉아 있는 풍경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자란 문화도 다른 이 사람들을 성경은 계속해서 한 단어로 부릅니다. "
형제." 베드로가 바울을 가리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라 부른 것처럼, 이들 사이에는 혈연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가족애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교회란 그런 곳입니다.

창세 전,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영원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살 한 무리를 이미 택하셨습니다. 시간의 순서가 없는 그곳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그 무리는 그냥 하나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이미 묶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역사 속으로 하나씩 내려와 어떤 이는 먼저 태어나고 어떤 이는 나중에 태어나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영원 안에서는 이미 한 가족입니다. 이것이 진짜 가족이고, 하늘의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 땅에서 또 다른 가족을 허락하셨을까요? 부모, 자녀, 형제자매, 우리가 목숨처럼 여기는 그 사람들 말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만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그런 애착의 대상을 주십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모든 것인 돈, 명예, 인기, 가족애을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대로 몸에 두르게 하셔서, 그것들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맘몬'이라는 단어는 단지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집착, 세상이 힘과 가치로 여기는 모든 것의 총합입니다. 그러니 가족에 목숨을 거는 것도, 결국은 맘몬을 섬기는 또 다른 방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
너는 정말 나를 위해 이것조차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솔직히 그 질문 앞에서 무너집니다. 당장 다음 달 렌트비가 없다는 걱정 앞에서,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나를 굶기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남이 나를 험담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속은 사실 요동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무력함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독입니다. 도박에, 술에, 담배에 붙들린 사람을 보면서 신앙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 믿는다면서 어떻게 그거 하나 못 끊어?" 이 말 속에는 은근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무언가를 끊어낼 힘과 의지가 있다는 전제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도박에 중독된다는 것은, 인간이 도박이라는 주인을 스스로 끌어당긴 것이 아닙니다. 도박이라는 세력이 그 사람을 찾아와 잠식하고, 언젠가 제 뜻대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감기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감기를 억지로 끌어당겨 앓는 게 아니라, 감기가 우리를 찾아왔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물러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까지 무력한 존재입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
내가 술을 끊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술이라는 것이 찾아왔다가 스스로 떠난 것일 뿐, 거기에 '내 의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들 앞에서 철저하게 무력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심지어 필요한 과정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그동안 즐기던 세상 낙을 단번에 다 끊었다고 간증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손이 떨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시 담배에 손을 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배워야 할 것은 '담배를 끊는 방법'이 아닙니다. "
담배가 나를 떠나기 전까지는, 나는 이것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하는 처절한 자기 인식입니다. 그것을 배웠다면, 설령 담배를 두세 갑씩 태우다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 배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담배를 끊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인지를 인정하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래된 습관 하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겉으로 반듯한 삶을 사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 습관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옛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
술 마시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가르치며 그것을 곧 경건의 증표로 여기게 했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그 수준에 머무르면 결국 남는 것은 "나는 술 끊었다, 담배 끊었다"는 자기 자랑의 경쟁뿐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깨끗한 삶'이 있다면 좋겠지만, 고린도전서 3장이 말하듯 그런 공로들은 결국 불에 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진짜 성도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내 안에서 의로움이나 선함이 요만큼도 나올 수 없구나." 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 헬라어 마데테스는 본래 '배우기에 힘쓰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무력함을 배우는 학생이지, 도덕적 성취를 자랑하는 우등생이 아닙니다.

이 무력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결박하고 그 집의 세간을 늑탈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세간'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집에서 살아 움직이던 '개'가 아니라, 그저 그 집에 놓여 있던 '가구'였습니다. 가구가 스스로 주인에게 "
제 자리가 마음에 안 드니 옮겨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능력 자체가 가구에게는 없습니다. 마귀가 놓은 자리에 그냥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내어 왕 노릇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왕 노릇'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상대방을 점령하여 자신의 나라로 끌고 간다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유의지를 발동해 무언가를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할 여지는 사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가장 처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시던 그 밤,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깨우셨는데도 그들은 다시 잠에 빠졌습니다. 성경에서 '세 번'이라는 숫자는 흔히 어떤 시도가 도무지 불가능함을 확인할 때까지 반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세 번 기도하신 것도, 바울이 세 번 가시를 없애 달라 간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세 차례의 시도라기보다, 될 때까지 매달렸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세 번의 깨움에도 결국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이제는 자고 쉬라." 왜 깨우지 않으시고 자게 두셨을까요? 그것은 곧 "너희는 원래 이렇게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내가 너희 대신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깨우시는 그 순간에만 깨어 있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중에도 문득 "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게 믿기지 않는다"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시편이 이미 말하듯, 본래 우리는 미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진리를 삶으로 보여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지아에서 미대 교수로 일하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재능 있는 화가였고, 사업도 크게 성공해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딸은 재벌가로 시집을 갔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그 시절, 그녀에게 하나님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오히려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삶을 일구었는지 자랑스러워하며 그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남편이 바람이 났고, 벌여 놓았던 부동산 투자들이 경기 침체와 함께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삶이 와르르 붕괴되던 어느 날, 마켓 앞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설교 CD 한 장을 건넸습니다. "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위대한 것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버리지 마세요." 흔히 지나칠 법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 CD를 버리지 않고 결국 들어보게 됩니다.

CD 속 젊은 목소리는 마치 그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처럼 그녀를 향해 쏟아냈습니다. 놀란 그녀는 그 설교를 전한 이들을 찾아 나섰지만, 인터넷도 다룰 줄 모르는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딸의 집이 있는 뉴저지에서 같은 CD를 나눠주던 한 집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 원하는 이들에게 CD를 나눠주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통째로 받아 조지아로 돌아가 밤낮으로 들었습니다. "
내가 지금 목매달아 죽으려 했었는데, 이 길이 맞는 길이었구나." 그렇게 깨달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주 뒤 그녀는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알거지가 된 채로 딸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딸에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엘에이에 가서 딱 한 번만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게 비행기표를 끊어달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도시로, 오직 예배 한 번을 위해 그녀는 떠났습니다.

낯선 교회에 도착한 그녀를 성도들은 돌아가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지만, 같은 은혜를 받고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밥을 지어 먹이고 잠자리를 내어주고 차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환대에 감격한 그녀는 어느 토요일, 설교 원고를 준비하던 목회자의 방에 조용히 들어와 큰절을 올리며 울었습니다. "
내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딸의 손자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챙겨 두었던 마지막 돈마저 헌금으로 드리고, 하루 종일 성도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성공담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녀는 부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무너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짜 가족을 만났습니다. 혈연이 아니라 같은 복음을 붙들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서로를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제자, 곧 성도란 결국 이런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남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으려는 자아 챙기기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그리고 나는 그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기에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화이고 진짜 변화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무언가에 붙들려 있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도박이든, 술이든, 가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든, 아직 나를 점령하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당신의 목적지로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기뻐 뛸 수 있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결심이나 성취가 아닙니다. 더 많이 비워지고, 더 많이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
나는 이렇게 무력한 존재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그 빈자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달라고 구하는 것, 그 낮은 자리로 오늘도 다시 내려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