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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사도행전 - 무너지지 않는 교회,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6.

사도행전 7장 1~2절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 성실하기로 소문난 교회가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는 새벽마다 강대상에 엎드려 기도했고, 성도들은 그 목사를 하늘이 보낸 사람처럼 따랐습니다. "
목사님 말씀이면 다 맞다"는 것이 이 교회의 불문율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 그 목사가 오랜 지병으로 갑작스레 쓰러지고, 이어 개인적인 허물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하자 교회는 통째로 흔들렸습니다. 목사를 붙들고 살던 성도들이 목사와 함께 무너진 것입니다. 누군가는 "내가 믿은 게 예수였는지 저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가 겨냥하는 바로 그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혹은 조직에게 인생을 걸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는 한 가지 결정을 내립니다. 구제와 행정을 맡을 일곱 집사를 세우고, 사도들은 "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기로 한 것입니다. 역할 분담이 명확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행전이 그 뒤로 자세히 기록하는 것은, 행정을 맡았어야 할 집사 스데반이 회당에서 사람들과 논쟁하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구제 활동이 얼마나 조직적이었는지, 행정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우선인 것은 조직도, 시스템도 아니라 말씀이다." 마치 어느 회사에 재무 담당으로 채용된 사람이, 정작 그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회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일임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계 장부는 깔끔했는지 몰라도, 역사에 남은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전한 한마디였습니다.

스데반이 고발당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교회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물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하나님은 교회를 창조하셨고, 마귀는 채플(예배당)을 만들었다." 얼핏 들으면 이상한 말 같지만, 그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참 교회,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십자가로 완성된 그 교회는 이미 영원 속에서 완료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세워진 눈에 보이는 지역교회들, 즉 채플들은 얼마든지 인간의 손에 의해 오염되고 조직화되고 정치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완벽해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목숨을 걸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던 그 백성 전체가, 결국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패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실패한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은 남은 자를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신약의 지역교회도 똑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교회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사실, 그것이 교회를 통해 세상에 증거되는 진짜 메시지입니다.

한 사람이 매일 다이어트에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라서가 아니라, 그를 끝까지 붙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마다, 그럼에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이 함께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자꾸 뒤집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여기고, 봉사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자신이 괜찮은 신앙인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특히 말씀 공부로 소문난 교회일수록 "
우리는 다른 데와 다르다"는 은근한 우월감이 자랍니다. 앞서 소개한 작은 마을 교회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목사를 통해 예수를 발견하려 하기보다, 목사 자체를 자신의 구원의 보증수표로 삼았습니다.

역사 속 신앙의 거인들을 봐도 이 위험은 명백합니다. 청교도 설교의 대가로 불리는 마틴 로이드 존스도 로마서 8장을 강해하며 한동안 석연치 않은 해석을 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영향 아래 있던 지역에서는 침례를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재세례파 신자 천 명 이상이 물에 던져져 죽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근대 부흥운동을 이끈 무디와 설교의 왕자로 불리는 스펄전은 죽는 날까지 흑인 노예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말년에 가정의 파탄과 수모를 겪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던 그 아들 솔로몬은 노년에 이방 우상을 성전에 들여놓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이 이런 실패담을 굳이 숨기지 않고 기록해 놓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간은 누구든 결국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이며, 그 무너짐을 덮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로 모입니다. 사람에게, 어떤 훌륭한 사역자에게, 어떤 감동적인 프로그램에 인생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와 지도자는 성도가 말씀 속에서 예수를 발견하도록 곁에서 안내하는 이정표일 뿐입니다. 이정표를 목적지로 착각하면, 이정표가 쓰러질 때 나도 함께 쓰러집니다.

어느 날 한 중년의 성도가 목회자를 찾아와 조심스레 고백했습니다. "
은혜에 관한 설교를 듣고 나니, 오히려 십수 년간 눌러왔던 죄를 다시 짓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는 은혜라는 말이 마치 뒷배경처럼 든든하게 서 있으니, 그동안 참았던 것이 허무해진 것입니다. 이 고백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죄의 기준은 행위 이전에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가 십수 년간 "참았다"고 말한 그 시간은 실은 죄를 이긴 시간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그 죄를 계속 짓고 있었던 시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행위를 억누른 대가로 얻은 것은 "나는 대단하다, 나는 절제할 줄 안다"는 자기 의였을 뿐, 하나님 앞에서는 다르지 않은 죄였던 셈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가 그 죄를 저지르고, 그 즉시 성령이 주시는 찌르는 듯한 죄책감과 아픔을 십수 년간 계속 겪어왔다면 어땠을까요? 그런 사람이라면 "
은혜가 있으니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감히 품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짜 회개는 죄를 안 짓는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우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평생 배워가야 할 단 하나의 과제입니다.

한 교회 공동체에 어린 자녀를 먼저 하늘로 보낸 부모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일을 두고 "
참 안됐다, 저 집안에 무슨 죄가 있었나" 하며 수군거리기 쉽습니다. 반면 같은 나이대의 아이가 명문대에 조기 입학했다는 소식에는 온 동네가 축하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의식중에 "오래, 잘 사는 것"을 복으로, "일찍 떠나는 것"을 불행이나 심판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천국을 정말로 믿는다면 이 셈법은 뒤집혀야 합니다. 어린 나이에 신앙 안에서 하늘나라로 간 것이 어째서 축하할 일이 아니고, 오래 사는 것만이 복이란 말입니까? 이 시대의 교회조차 은연중에 세상의 가치관인 장수와 부유함이 곧 복이라는 셈법을 그대로 들여와 있습니다. 지역교회가 이렇게 세상과 똑같은 잣대로 자신을 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앞서 말한 "
인간의 한계가 폭로되는 자리"로서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어떤 인물이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것으로 존경받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
내 이름으로 낸 책들을 더 이상 찍어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시다. 언뜻 겸손한 마지막 부탁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그 유언 자체가 "이 책은 끝까지 내 것"이라는 소유의 확인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을 붙들고 놓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경고하는 "
자아의 집짓기"입니다. 선행이든 금욕이든, 그것이 결국 자기 영광과 자기 이름을 세우는 도구가 된다면,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서져야 할 성벽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세상이 자랑스레 쌓아 올리는 자아의 건물을 예수님은 계속해서 허물어 가시고, 그 자리에 오직 은혜로 지어지는 새집을 세우십니다. 열심히, 경건하게, 깨끗하게 사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열심의 최종 수신자가 누구인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 시대 최고의 권력과 학식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데반을 처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결국 거짓 증인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지식을 가져도, 진실 앞에서는 조작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인간 권력의 실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율법을 손에 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유독 연약한 여성들을 공격하는 자리에 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불태워 죽이려 했고, 모압 여인 룻은 율법상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처지였으며,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고, 다윗의 밧세바 역시 율법으로는 죽어 마땅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절박한 자리마다 기어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다말도, 룻도, 밧세바도 모두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율법이 정죄하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바로 그 부정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
신부"라 부릅니다. 연약하고 흠 많은 우리를, 예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신부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처지, 곧 죽임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데반의 첫마디는 원망이나 변명이 아니라 "여러 부형들이여 들으소서"였습니다. 마지막 숨을 앞두고도 그는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기던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그 은혜의 실체이신 예수를 당신들이 죽였으니 회개하라고 선언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포도원 농부 비유와 정확히 겹칩니다. 소작농들은 나름대로 부지런히 포도를 가꾸며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인이 요구한 열매는 그들이 자기 방식으로 맺은 열매가 아니라 '회개'라는 열매였습니다. 그것만큼은 내놓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그것을 요구하러 온 종들을 죽이고 마침내 아들까지 죽입니다.

여기서 짚을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에게는 열두 군단도 더 되는 군사가 있었지만, 그는 홀로 아들을 내려보냅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혼자 보내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비유를 듣고 즉시 알아챕니다. "
이것은 우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모든 비유 중에 유일하게 그들이 정확히 알아들은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자기 열매, 자기 의로 지어 올린 집을 부수시고, 오직 은혜의 돌 위에 새집을 지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향하는 결론은 단순합니다. 세상에 무언가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이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 하셨지, 세상이 제자들에게 감화될 것이라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조용히 살아가면, 세상은 그런 우리를 여전히 불편하고 재수 없게 여길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스데반처럼, 세상에게 맞고 욕먹고 무시당하면서도 "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인가"를 끊임없이 직면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도 내세우지 않은 채 그저 이렇게 구할 뿐입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옵소서." 무언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낮은 자세로 구걸하듯 부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당신 없이는 제가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사도행전 7장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마지막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