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도행전 말씀 묵상

물고기 무리, 배가 지배하는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6.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사도행전 6:1~4)

어느 시골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스무 명 남짓 모이던 예배당에 이제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담임목사는 뿌듯했습니다. 핍박도 견뎌냈고, 어려운 시절도 지나왔으니 이제 좀 평안하게 이 부흥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교회 안에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토박이 성도들과,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온 외지인 성도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매주 화요일마다 교회는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반찬과 쌀을 나누어 드렸는데, 언제부턴가 외지인 성도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늘 뒷전이다. 토박이 어르신들만 먼저 챙기고 우리는 나중에 남는 것만 받는다." 처음엔 작은 수군거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망은 커졌고 급기야 담임목사에게 직접 항의하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6장의 예루살렘 교회가 겪은 일이 정확히 이와 같았습니다. 제자가 급격히 늘어난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섞여 있었고,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소외된다는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5장까지 그토록 무섭게 몰아치던 산헤드린의 핍박도 교회의 확장을 막지 못했는데, 정작 교회를 뒤흔든 것은 외부의 칼이 아니라 내부의 밥그릇 문제였습니다.

그 시골 교회의 담임목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많은 목회자들이 그러하듯, 급히 회의를 소집해 배분 규정을 다시 짜고, 담당자를 바꾸고, 공평성을 확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책임 있는 리더의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하는 일을 맡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너희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는 오직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

이 구절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읽습니다. "
아, 그러니까 구제와 봉사는 집사가 하고, 말씀과 기도는 목사와 장로가 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직분을 나누고 조직표를 그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라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야 합니다. 일곱 집사를 세운 직후 예루살렘 교회는 이 분업 시스템 덕분에 평안해졌어야 하는데,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 보면 오히려 그 직후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는 극심한 박해 속에 흩어집니다.

사도들이 정말 깨달은 것은 분업의 필요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가 많아지는 일에 마음을 쏟는 동안,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본질적인 사명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일을 저들에게 맡기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는 선언은 역할 분담의 매뉴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다시 붙들어야 할 우선순위에 대한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제와 섬김이 하찮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근대적 병원 제도와 공교육의 뿌리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가 늘 앉아 있었던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가난한 자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제 자체는 불신자들도 하는 선한 일이니, 하나님의 백성이 그 일에 무관심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실한 권사님이 매주 독거노인 가정을 방문해 반찬을 해다 드리는 일을 십 년 넘게 해오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 소식지에 그 봉사가 실리고, 다른 교인들이 "
권사님처럼 살아야 하는데"라며 칭찬하기 시작하자, 권사님의 얼굴에서 조금씩 다른 표정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봉사를 빠지는 날이면 죄책감이 아니라 "내 기록이 끊긴다"는 초조함이 앞섰고, 새로 들어온 봉사자가 비슷한 일을 시작하자 은근히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훗날 스스로 고백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모른 채 쌓이는 선행의 위험입니다. 선한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감사의 열매가 아니라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훈장이 되어버릴 때, 그 행위는 결국 경쟁이 되고 맙니다. 야고보서 4장이 말하듯 다툼의 뿌리는 언제나 우리 안의 욕심이며, 그 욕심은 선행이라는 근사한 옷을 입고도 얼마든지 살아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추모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였습니다. 종교를 떠나 온 사회가 그의 선함과 나눔의 삶을 칭송했고, 그의 마지막 헌신을 본받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만약 착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이 곧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면, 어째서 세상은 그렇게까지 뜨겁게 환호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참된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회 정의를 외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촛불을 드는 교회는 언론의 찬사를 받습니다. "
역시 믿음이 좋은 교회는 행동도 다르다"는 칭찬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핍박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답은 사도행전 6장 안에 있습니다. 사도들이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갈등을 근사하게 조정해 주었다면, 아마 양쪽 모두에게 칭찬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대신 물러나 말씀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순간 원망을 샀을 것이 분명합니다. "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고 호소했는데, 사도들은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말씀 타령이냐"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정의한 선함의 기준을 좇아 그것을 만족시키는 순간, 교회는 세상의 박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박수 뒤에는 종종 본질을 놓친 자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건강하고 개혁적이라 평가받는 교회들이 사회를 향해 외치는 상당수의 구호가, 사실은 헬라파 과부의 몫을 히브리파에게서 덜어 나누자는 조정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 사도들의 통찰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이 방문하신 날, 마르다는 분주히 손님을 대접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화가 나서 예수님께 항의했을 때, 예수님은 뜻밖에도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 세상은 언제나 마리아를 향해 손가락질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이 무슨 소용이냐. 언니는 저렇게 애쓰는데 너는 앉아서 뭐 하느냐." 재난이 나면 "지금 성경 볼 때냐, 나가서 도와야지"라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그러나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이 마음 주실 때 행하는 진짜 섬김과,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서둘러 증명하는 선행은 겉모습이 비슷해도 본질이 다릅니다.

흥미롭게도, 은혜를 강조하며 설교할 때 가장 먼저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흔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온 이들, 스스로 흠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
당신이 이렇게 살아왔으니 예수가 필요 없다고 느낀 적은 없느냐"는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이 처음엔 발끈합니다. 자신의 선행이 이미 자기 안에서 점수로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그 질문이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장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곳은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는 자리가 아니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불리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삶의 자리입니다. 이미 자기 의로 가득 찬 그릇에는 은혜가 들어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를 "
더러운 옷"이라 표현했습니다.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그것은 정갈한 옷이 아니라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누더기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선행과 의로움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사무엘상에서 사울 왕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왕위에서 폐하셨습니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책망은, 우리가 스스로 판단한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본질임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문양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헬라어로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앞글자를 모으면 익투스, 곧 물고기가 됩니다. 그 상징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상징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 곧 배일 때가 많습니다. 시골 교회의 그 다툼도, 예루살렘 교회의 그 원망도 결국은 같은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말씀보다 당장의 필요와 공평함에 더 마음을 빼앗긴 자리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우리에게 조직표를 그려주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교회가 무엇에 최우선으로 붙들려야 하는지를 되묻습니다. 구제와 섬김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 교회는 방향을 잃습니다.

그 시골 교회의 담임목사가 만약 배분 규정을 손질하는 대신, 강단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붙들고 성도들 앞에 섰다면 어땠을까요? 당장은 "
목사가 우리 문제를 외면한다"는 원망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사도들이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의가 똥걸레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