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라."(사도행전 5:39~40)
산헤드린 회의장, 사도들을 당장 죽이자는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특별히 큰 목소리를 낸 것도, 위협적인 몸짓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일어서는 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습니다.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랍비였고, 갈라져 있던 두 신학 학파를 하나로 묶어낸 지성이었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훗날 이렇게 자랑하게 됩니다. "나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 제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가말리엘은 말합니다. "드다와 유다를 보라. 그들도 큰 무리를 모아 봉기를 일으켰지만, 결국 흩어지고 망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의 일이면 너희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지켜보자." 논리적으로 들립니다. 신중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위험한 전제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성공하면 하나님의 일, 실패하면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훗날의 역사를 다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도들 대부분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고, 바울은 목이 잘렸습니다. 가말리엘의 기준대로라면 이들은 전부 "망한 사람들", 즉 가짜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말 그럴까요?
여기 한 사람의 이력서를 봅시다. 고린도 교회 어딘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 경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문화권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업적과 자격을 적은 추천장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로마 황제조차 자신의 치적 삼십여 가지를 나열한 문서를 갖고 다녔다고 하니, 그 시대의 "이력서 문화"가 얼마나 확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바울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이력서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내놓은 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 파선하고,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날로 치면 이런 겁니다. 회사 면접장에서 "당신의 경력을 말해보시오" 했더니, 지원자가 "저는 여섯 번 해고당했고, 세 번 사업에 실패했고, 한 번은 노숙자가 될 뻔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면접관들은 헛웃음을 지었을 겁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그런데 바울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이 고난의 목록을 자신의 "자랑"이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셈법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펼치면 앞부분(1~14절)에는 이런 약속이 나옵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며..." 이 구절이 액자로 만들어져 수많은 가정과 교회 벽에 걸려 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15절 이하를 넘겨보면 정반대의 목록이 나옵니다.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 부분은 액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도 걸어두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걸고 싶어 하는 앞부분의 복은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면." 그런데 우리 중 누가 그 모든 말씀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냉정히 말하면, 이 조건 앞에서 우리 모두는 뒷부분, 곧 저주의 목록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이 저주의 목록이 실제 삶으로 고스란히 나타난 사람이 딱 둘 있습니다. 예수님, 그리고 그분을 따라간 바울입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굶주리고, 파선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버려진 적도 있습니다. 그가 개척한 교회조차 그를 배척했습니다. 겉모습으로만 보면 그는 신명기 28장 15절 이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미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들어와도 저주, 나가도 저주"를 온전히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복과 저주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아버지가 자녀의 모든 빚을 대신 갚아주었는데, 그 자녀는 여전히 청구서가 날아오는 낡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여전히 가난하고 힘든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집의 진짜 주인은 이미 빚을 다 갚은 사람의 자녀입니다. 청구서가 날아오는 것과 실제로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고난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저주받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난의 목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력서로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왕이 말합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되묻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리했습니까?" 이 되물음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특별한 선행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았을 뿐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우리 주변에 유난히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 사람, 신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 마치 몸이 아픈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죄지어서 저런 거야"라고 수군거리던 예수님 시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내려와 보라."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의 이유를 그 순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받는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은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게 있다"고 성급히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 옛날 조롱하던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고난받는 이의 삶 속에서 지금 그리스도의 삶이 조용히 자라나고 있는 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정말 많이 받습니다. 어떤 분은 진로를 놓고, 어떤 분은 이직을 놓고, 어떤 분은 사업을 놓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질문 뒤에 숨은 진짜 바람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내가 더 편안하고, 더 유익하고, 더 잘 풀릴 쪽"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싶어 합니다. 마치 오늘 아침 날씨가 맑으면 좋은 신호, 흐리면 나쁜 신호라고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를 말렸습니다. "올라가면 큰일 난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올라갔습니다. 왜였을까요? 그의 관심이 "내가 더 편안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관심이 오직 나의 유익에 있다면, 좋은 징조든 나쁜 징조든 그것이 우리를 쉽게 흔듭니다. 그러나 진짜 관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은 어느 길로 가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 인생에서 "그때 그 선택만 안 했어도"라고 후회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통과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 전체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빚어가시는 과정이었다는 고백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부흥회에서 사람들이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신비한 현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집단적 감정의 고양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원리들이 있습니다. 화려한 언변과 감성을 자극하는 장치들은, 신앙과 무관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그 힘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준 인물 중 하나가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연설 전 음악과 감성적인 언어로 청중의 마음을 먼저 격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경제적 성과, 실업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것도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힘과 성과가 그를 정당화해주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단순합니다. 큰 기적, 뜨거운 열정, 눈에 보이는 성공, 이런 것들만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앙, 다른 신념 체계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의 일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이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곳,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이력서를 쓰고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과 성취, 화려한 경력을 이력서에 담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력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연약함과 고난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내놓을 수 있는 이력서가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그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 기준으로 초라해 보일 때, 오히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고백이야말로, 가말리엘의 성공 기준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진짜 하나님의 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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