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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말씀 묵상

사사기 - 옆구리에 박힌 신부, 보김에서 울던 사람들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

사사기 2장 1~5절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 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자신들의 힘으로 치르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던 날, 그들은 망치질 한 번,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벽을 돌았을 뿐인데 성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날 백성들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
우리가 이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다."

그런데 사사기 1장 끝으로 가면, 놀랍게도 정반대의 장면이 나옵니다.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섰던 단 지파가 이제는 거꾸로 아모리 사람들에게 쫓겨서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정복자가 아니라 도망자의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타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
이 성 하나쯤은 나중에 정리하지" 했던 것이, "이 사람들과는 그냥 같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이 정도면 우리가 원래 있던 자리보다 훨씬 낫다"는 만족감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하던 사람이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몇 달 후에는 예전 체중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의 작은 타협이, 나중에는 방향 자체를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산 위에 몰려 있을 때, 낯익은 손님이 다시 찾아옵니다.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이 손님이 누구인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확인된 바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어느 날,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없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이상히 여겨 다가간 모세에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 사자를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출3:2~4). 사자로 오셨지만 여호와라 불리는 분, 훗날 기드온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똑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이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 걸쳐 늘 함께 걸어오신 그 동행자가, 백성들이 가장 초라해진 순간에 다시 얼굴을 내미신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소식이 뜸했던 어른이, 하필 자식이 큰 실수를 저지른 바로 그날 문 앞에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반가움보다 먼저 두려움이 앞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몰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23:20~33). 그런데 같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조금씩 쫓아내리라"(출23:29~30). 전지전능하신 분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남겨진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일지, 그들의 신전과 축제와 풍요가 얼마나 유혹적일지,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방식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위험한 것을 만지지 못하도록 아예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치워버립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그것이 왜 위험한지 몸으로 배우기를 원해서,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두고 지켜봅니다. 물론 완전히 방치하지는 않습니다. 옆에서 계속 "
그건 만지면 안 돼"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한 번은 만져 보고, 데어 보고, 울고 나서야 그 말의 무게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신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은혜를 떠난 존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파괴적인지, 그리고 그 매력적인 것을 붙잡았을 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백성들이 직접 겪어서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두 가지가 동시에 드러납니다. 인간의 무력함,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출애굽에서 시작해 광야를 거쳐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이 모든 여정의 목적은 딱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렀다고 본문은 굳이 밝힙니다. 이 한 단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였습니다.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직후,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강바닥에서 돌 하나씩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웠습니다(수4:4~9). 훗날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슨 뜻입니까" 묻거든, "우리 조상들이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넌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 때문이었다"고 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큰 위기를 넘긴 뒤 그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두고, "이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대대손손 잊지 않게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길갈에서 한 가지를 더 명령하십니다. 할례입니다(수5:2~9). 이 명령이 얼마나 이상한 타이밍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시 가나안의 모든 왕들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수5:1). 지금이야말로 적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절호의 공격 타이밍입니다. 전쟁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 순간에 전면전을 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하십니다. 이스라엘 남자 전체를 할례시켜 버리십니다. 당시 할례를 받으면 며칠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즉 전투력을 스스로 제로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 순간 가나안의 어느 족속이라도 기습해 왔다면 이스라엘은 그대로 전멸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전쟁이 이스라엘의 힘으로 치르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큰 시험을 앞둔 학생에게, 시험 전날 밤 오히려 책을 덮고 일찍 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
네 밤샘 공부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것이 너를 지킬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몸으로 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리고 전쟁 직전, 여호수아 앞에 칼을 든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
너는 우리 편이냐, 대적의 편이냐." 대답이 뜻밖입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수5:13~14).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것은 단 한 가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방식과 계획을 벗겨내러 온 것입니다.

길갈은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새겨준 곳이었습니다. "
이 전쟁은 너희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너희는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정말로 여리고 성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여리고에서 완벽한 순종의 승리를 경험한 바로 다음,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은 어이없이 패배합니다. 원인은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노획물 중 일부를 몰래 자기 것으로 챙긴 데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단지 아간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속에 숨어 있는 죄성을 드러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회사에서 한 직원의 작은 부정이 적발되었을 때, 사실은 그것이 조직 전체에 만연한 안일함의 축소판이었음이 드러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
완벽한 순종"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가 폭로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사사기 2장으로 돌아가 보면,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
보김"이라는 곳이, 사실은 여호수아 시대의 그 "아이 성" 자리와 겹친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보김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는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만 드릴 수 있었고, 당시 언약궤는 벧엘에 있었습니다(삿20:26~28).

게다가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은 이 "
보김"이라는 지명을 아예 "울음의 장소 벧엘, 곧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풀어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벧엘은 다름 아닌, 여호수아가 함락시켰던 그 아이 성이 있던 자리였습니다(수8:15-17).

다시 말해 사사기 2장의 무대는,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의 죄가 낱낱이 드러났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치 몇 년 전 큰 실수를 저질렀던 바로 그 장소에 다시 서게 된 사람처럼, 여호와의 사자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묻습니다.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어찌하여 청종치 아니하였느냐"(삿2:2).

이어지는 3절이 이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입니다. "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흔히 알려진 "가시"라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와 여호수아서의 비슷한 구절에는 "가시"라는 표현이 나오지만(민33:55; 수23:13), 사사기 본문은 그냥 "옆구리가 되리라"고만 말합니다. 이 표현은 고대 히브리어 관용구로 보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신부"가 될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형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그들의 문화를 즐기고, 그들과 섞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자녀에게, 부모가 어느 순간 손을 놓으며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라"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유가 얼마나 무거운 대가였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와 세상 사람의 차이는, 세상을 아예 안 보고 안 듣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에게는 영의 눈과 귀가 열려 있어서, 세상의 화려한 포장 뒤에 숨은 실체를 보고 듣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묘사한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만 실은 우준해집니다(롬1:21~25). 성도는 그런 삶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자신 역시 여전히 그 유혹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갈망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고 해봅시다. 원하던 자리, 원하던 관계, 원하던 성취, 그런데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예상했던 만큼의 행복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히려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그냥 "
인생이 다 그런 거지" 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눈과 귀가 열린 사람은 그 공허함 속에서 무언가를 봅니다. "내가 붙잡은 이것이 나를 채워줄 수 없구나"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신부"로 묶인 자가 겪는 고통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고통이 우리를 정죄하는 형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방인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옆구리의 찔림과 올무의 저주를, 그분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영원한 정죄는 이미 예수 안에서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속에 다른 종류의 아픔을 남겨두셨습니다. 영원한 형벌로서의 아픔이 아니라,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마땅히 느껴야 할 현실 인식으로서의 아픔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미 빚을 다 갚은 사람이라도 예전에 진 빚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은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기억이 그를 다시 빚쟁이로 만들지는 않지만, 그 기억은 그가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힘듦은 복된 힘듦입니다. 그 작은 아픔들을 겪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최종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지막 장면에서 백성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웁니다. 얼핏 보면 회개의 눈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단락을 보면 진실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삿2:11~12). 방금 울었던 사람들이, 곧바로 다시 우상을 섬기러 갑니다.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이게 너무 좋은데 왜 자꾸 못 하게 하세요"라는 원망과 억울함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는 듯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진짜 회개와 그저 순간의 감정적 반응은 겉모습이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보김의 눈물은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보김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
우는 자들의 자리."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 역시 종종 보김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도 나지만, 돌아서면 다시 우리가 붙잡고 싶었던 것을 붙잡으러 갑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끝은 절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불가능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무력함이 드러날수록 당신의 은혜를 더 선명하게 세워 가십니다. 길갈에서 확인된 언약은, 보김에서 배반당하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옆구리를 찌르는 이방인도, 신부로 묶인 세상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나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여전히 세상과 씨름하며 아파하고 있다면, 그것을 낙심의 증거로만 여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눈과 귀가 열려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잘 견뎌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