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1)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사사기 1:16~21)
사사기 1장을 읽다 보면 마음에 계속 걸리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은 분명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는데, 성경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쫓아내지 않았다가 아니라,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무서워서 못 쫓아냈구나.” “전쟁이 힘들어서, 철병거가 있어서 겁이 났구나.”
그런데 사사기 1장을 끝까지 읽어 보면, 이 해석은 점점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약할 때만 가나안 사람을 남겨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삿 1:28) 약해서 못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이길 수 없어서 남겨둔 것도 아닙니다.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남겨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믿는가,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하는가, 내가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가, 그래서 믿음은 늘 “나의 상태”, “나의 결심”, “나의 태도”를 점검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결국 이렇게 바뀌어 버립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유지하는 건 내 태도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의라면, 그리고 그 구원이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믿음은 결코 “나의 태도”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나의 태도라면, 구원은 결국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졌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다만, 그 십자가는 아무에게나 능력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만 그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신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면, 광야에서 물이 없어도, 음식이 없어도 불평 대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끝까지 데려가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광야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나빠질 때마다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태도는 가나안 정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마음이 누구에게 붙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다면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반드시 “남겨둘 이유”를 찾게 됩니다.
유다 지파는 산지의 거민들은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철병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무기가 강해서 무서웠구나.”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만약 두려움이 이유였다면, 이스라엘이 강성해진 후에는 왜 여전히 쫓아내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고 부려먹기 시작합니다. 철병거는 단순한 무기가 아닙니다. 그 시대의 기술, 문명, 생산력, 미래를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이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이건 있으면 도움이 되잖아.” 그래서 성경은 “쫓아내지 않았다”가 아니라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철병거는 무엇일까요? 안정된 직장, 인정받는 자리, 사람들의 평가, 돈, 스펙, 인맥, 신앙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안전장치들은 악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있으면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정도는 남겨둬도 되지 않나요?” “이건 하나님 대신이 아니라, 하나님 옆에 두는 거예요.”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철병거가 됩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쫓아내고 철병거를 남겨두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리고가 무너진 후, 아간은 외투 한 벌과 은과 금을 숨깁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리고도 여리고의 것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의 것은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리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그리스도만으로 살아도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이 이 사랑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 유다는 철병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붙들려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다 쫓아내라.” “오직 나만 사랑하라.”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믿되, 이것도 좀 남겨두자.” 그리고 어느새 쫓겨나야 할 것은 귀하게 남아 있고, 귀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습니다. “당신의 철병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지금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다른 것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 고백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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