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수아가 죽은 뒤, 사사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삿 1:1) 이 문장은 사사기 전체를 여는 문이자, 이스라엘의 운명을 가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 우리 신앙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남기지 않으셨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읽다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장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모세가 죽을 때는 여호수아라는 분명한 후계자가 세워졌지만,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아무런 지도자도 남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을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보다 여호수아가 더 낫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모세는 실패한 지도자요 여호수아는 그 대체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신명기 34장은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립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 모세는 부족해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대체한 인물이 아니라, 모세의 사역을 이어가는 증인이었습니다. 즉, 여호수아는 ‘새로운 지도자’가 아니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더 이상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도자를 능력이 있고, 결단력이 있으며, 위기를 돌파하고 공동체를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모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말이 둔합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지도자가 되기에 가장 부적합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지도자란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성공시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포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의 버림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은 이스라엘을 낮추고,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교육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실패 속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 길로 행하라. 그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여호수아 역시 같은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가 새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실패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버려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직접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실 이 질문은 굳이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될 문제처럼 보입니다. 전략회의를 열어도 되고, 장로들이 모여 결정해도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묻습니다. 누가 먼저 싸울지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는, 현대인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인간은 성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천국에는 ‘정신적 성인’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란 누구입니까?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책임진다고 믿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는 모습은 바로 이 어린아이의 태도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은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삿 1:2) ‘붙였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표현입니다. 마치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다 주셨다면 굳이 싸우러 올라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 공동체인지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 성공은 네 노력의 결과다. 실패는 네 무능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다릅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성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실패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율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타율적인 공동체입니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모세는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이유로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가혹한 처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실패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희의 실패를 넘어서는 나의 은혜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가나안 입성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입니다. 출세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것입니다.
전쟁 중 유다는 아도니 베섹의 수족 엄지가락을 끊습니다. 잔인해 보이는 이 장면에서 아도니 베섹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그는 강한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를 당하는 존재였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줍니다. "너희도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든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존재다." 그 사실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둘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묻고 살아갑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은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수치를 당해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공하려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지 않게 되었을 때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의 비극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 할 때, 신앙은 종교가 되고 하나님은 장식품이 됩니다. 하나님이 붙이시는 삶을 사십시오. 원하는 것을 붙여 달라고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내 몫으로 받으십시오. 그것이 어린아이의 믿음이며 천국 백성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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