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세기 3:15)
인간은 처음부터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에덴동산의 한복판에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이 두 나무는 단순한 식물적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질서를 드러내는 영적 좌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 인간이 창조주 아래에 있어야 할 피조물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경계였습니다. 질서였습니다. 동시에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간교한 유혹 앞에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 넘겨줍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단지 하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순종의 끈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행위언약의 파기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봐야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단지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예정된 드라마의 일부였습니다. 행위언약은 애초부터 인간이 지켜낼 수 없는 언약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폭로하기 위한 무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를 선포하시지만, 동시에 가장 놀라운 복음의 씨앗을 심으십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입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 곧 죄와 죽음, 마귀의 권세를 꺾을 자가 올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는 은혜언약의 시작이자 복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죄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계시가 시작된 지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저주 속에 복을 감추시고, 죽음 속에 생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은 그저 따뜻한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희생과 피 흘림 없이는 인간의 수치를 가릴 수 없음을, 즉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여준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두 언약이 만나는 지점은 십자가입니다. 행위언약은 인간에게 명령합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고, 죽음이 그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지점에서 하나님은 다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아담에게, 오히려 여자의 후손을 통한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두 언약은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만납니다. 십자가는 행위언약 아래에서 죽어야 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죽으시는 장소이며, 동시에 은혜언약에 따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장소입니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단지 에덴동산의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나무는 율법을, 생명나무는 복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을 위해 생명나무로 오셨고, 자신이 찢기심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먹이십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은 십자가로 이어지는 언약의 여정입니다. 창세기 3장의 비극은 성경 전체에 잔잔히 흐르는 거대한 은혜의 강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속에서도,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서도, 모세의 율법과 출애굽의 사건들 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이 두 언약이 교차하며 흐르고 있음을 봅니다. 노아의 무지개 언약은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저주로 온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은 인간의 생식력, 곧 생명을 잘라내며, “너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너를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겠다”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출애굽 사건의 유월절 어린양, 홍해를 건너는 세례의 사건, 모두 죄인이 죽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완성은 계시록에서 드러납니다.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고, 그것의 열매를 먹는 자들은 영원히 산다고 말합니다(계 22:2). 다시 말해, 선악과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생명나무로 끝납니다.
오늘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언약 아래에 서 있는가? 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자손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너져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이기도 합니다.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은 실패를 넘어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나는 피조물로서 한계를 지닌 자이지만, 그 한계 속에서 주님의 은혜는 더 깊이 작동합니다. 십자가는 나의 끝이자 시작입니다. 죽음이지만 동시에 생명입니다. 절망의 장소이자 은혜의 무한한 샘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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