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 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3~7)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발견했을 때, 그는 기쁨에 겨워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함께 즐거워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부지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의 집요한 사랑,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은혜를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지하묘지인 카타콤베에서 숨어 살면서도, 벽에 ‘선한 목자’ 그림을 새겼습니다.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위로와 소망이었습니다. 언제든 잡혀가 사자의 밥이 될 수 있는 두려움 속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 23편의 고백은 생명줄과 같았을 것입니다.
후대에 복음서가 정경으로 정리되면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신 구절과,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함께 읽히면서, ‘예수님 = 선한 목자’라는 도상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아내며, 따뜻하고 인자한 얼굴의 예수님이 양을 안거나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선한 목자’는 조금 다릅니다. 그의 그림 속 예수님은 화려하지도, 인자하게 미소 짓지도 않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얼굴에는 피곤이 묻어납니다. 오랜 시간 길을 걸으며 숲을 헤치고 강을 건너고, 때로는 늑대와 맞서 싸운 흔적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옷은 해어지고, 얼굴은 초췌합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목자’라는 단어보다 ‘선한’이라는 단어가 더 깊이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단순히 양을 돌보는 직업적인 목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며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내시는 ‘절대 선’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선하다’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쓰는 ‘착하다’, ‘동정심이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절대적인 속성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선하다’고 부를 때, 그것은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의 칭찬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함’은 차원이 다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만이 GOOD(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언어적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 GOOD은 GOD(하나님)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기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참된 선도 그분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선한 목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착한 일을 많이 하셔서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절대 선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된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반드시 목자가 찾아야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 길 잃은 우리 인생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피곤과 수고를 무릅쓰고, 때로는 상처를 입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선한 목자’라는 단어 속에 담긴 참된 의미는 희생과 절대적인 선함입니다. 그분이 선하신 것은 우리보다 조금 더 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목자이신 것은 직업적으로 양을 돌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업적이나 선행으로 구원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선하신 하나님,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과 자랑이 되십니다. 오늘도 절대 선이신 그분께 기대어, 잃어버린 양이 되어 다시 품에 안긴 자로서,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 지체하시는 예수님 (0) | 2025.08.23 |
---|---|
탕자의 귀향, 그리고 하나님의 두 손 (0) | 2025.08.23 |
마르다와 마리아 - 분주한 손과 고요한 귀 (0) | 2025.08.23 |
가나안 여인 - 부스러기 은총을 구하는 믿음 (0) | 2025.08.23 |
백부장의 믿음 - 말씀만 하옵소서 (0) | 2025.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