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세기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 약속의 땅에서 처음 마주한 현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세기 12:5~9)

아브라함은 드디어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죽음으로 더 이상 하란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사라졌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소유와 함께 길을 떠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발을 딛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며 기대합니다.
“드디어!” “고생 끝, 약속의 시작!" “이제부터는 젖과 꿀이 흐르는 세계가 펼쳐지겠지!”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기대를 단숨에 깨뜨리는 한 문장을 기록합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창12:6) ‘통과하다.’ 정착한 것이 아니라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나안을 지나
‘하늘의 본향’을 향해 가는 삶 전체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얻으러 온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계속 걸어가도록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처음 마주한 풍경은 모레의 상수리나무 앞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첫 발을 내딛은 가나안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기대한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이 단어들은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가나안의 우상숭배와 이방 종교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모레는
‘지침, 교사’라는 뜻이지만, 종종 무당, 점치는 자를 의미합니다. 상수리나무는 가나안 종교에서 제사와 음란한 종교 의식이 드러나던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화려한 축복의 세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우상과 음란과 세속의 힘이 가득한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와 가치가 가나안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곳은 정리된 약속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발 디딜 틈이 없는 세상의 한복판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로 이끄실까요?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평안해지고, 삶이 정리되고, 이전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실제 패턴은 이렇습니다. 구원 직후 만나는 것은 편안한 푸른 초장이 아니라, 세겜 땅의 모레와 상수리나무, 즉 세상의 헛됨·유혹·우상적 가치관입니다.

왜일까요? 성경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성도는 예수를 믿고서야 비로소 세상의 정체를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과 내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인 성공, 풍요, 안정, 명예, 다산 같은 것들이 나의 꿈이었습니다.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갑자기 세상과 다른 방향을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우상으로 가득한지, 얼마나 풍요와 힘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 없는 삶을 당연히 여기는지, 그리고 내가 그 속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살아왔는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 한복판에 던져 넣어 다름을 보이게 하시기 위해 그곳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행 티켓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말씀·순종·믿음·의로움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겜 땅으로 이끄십니다.

세겜 땅에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행동을 합니다. 첫번째 장막을 칩니다. 그는 가나안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땅을 순례의 땅으로 살았습니다. 이 땅이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곳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제단(단)을 쌓습니다. 그는 이동할 때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세겜에서 단을 쌓고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도 단을 쌓고 남방으로 가서 생을 마칠 때까지 단을 쌓았습니다.

장막은 그의 정체성인
“나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이고 단은 그의 신앙의 고백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장막은 이 땅을 소유하지 않음, 이 땅의 가치관을 붙잡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단은 삶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흔적을 남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레와 상수리나무’는 무엇인가요? 오늘 세겜 땅의 풍경은 이렇습니다. 보이는 힘과 스펙을 우상화하는 사회, 풍요와 성공만을 가치로 삼는 세계, 나보다 약한 자를 밟고서라도 올라가려는 분위기, 돈이면 해결된다고 믿는 구조, 관계 속에서 상처 주기 쉬운 말과 선택, 이익 앞에서 쉽게 양보하지 못하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갈등입니다.

모레의 지침은 지금도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더 가져라, 더 높아져라, 더 편해져라, 너를 먼저 지켜라.”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따라 걸어라. 너의 선택이 너의 믿음을 증거한다.” 성도는 바로 이 땅 한복판에서 ‘다르게 선택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올바르게 선택합니다. 세겜 땅은 선택의 자리입니다. 세상적 지침(모레)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세상의 우상 앞에서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결국 세개의 풍요와 힘과 숫자와 유혹 앞에서 가나안 사람과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세상의 지침은 점점 힘을 잃고 하나님의 뜻이 선택의 기준이 됩니다. 말씀이 없으면 내 마음은 항상 ‘
모레’에게 배웁니다. 말씀이 있으면 내 마음은 ‘하나님’에게 배웁니다.

우리는 모두 세겜 땅을 지나고 있습니다. 성도는 모두 세겜 땅을 지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직장에서, 갈등이 생긴 가정에서, 돈의 유혹이 있는 자리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서, 분노와 자존심이 시험받는 순간마다 우리는 모레의 상수리나무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디에 단을 쌓을 것인가? 어떤 삶의 흔적을 남길 것인가?

아브라함의 길은 화려한 번영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단을 쌓으며, 장막을 치며,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이렇게 말합니다. “
약속의 땅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세겜 땅의 거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성도가 되기를 오늘 말씀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