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입니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문장은 우리가 '소명'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많은 오해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소명을 마치 정복해야 할 산봉우리처럼, 이루어야 할 위대한 목표처럼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소명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입니다.
메이 사튼의 시는 이 진실을 아름답게 증언합니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 시간이 많이 걸렸네." 시인은 자신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고백합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연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에 얼마나 긴 여정이 필요합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까. 부모가 원하는 자녀의 얼굴,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한 사람의 얼굴, 조직이 기대하는 충성스러운 구성원의 얼굴, 우리는 남의 얼굴을 빌려 쓰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자기 얼굴인 줄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많은 이들이 종교적 환경에서 '소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웁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배우는 소명의 개념은 종종 왜곡되어 있습니다. 소명이란 자신을 향해 외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도덕적 요구의 목소리라고 배웁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아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죄 많은 자아는 '선'이라는 외부의 강제적 힘으로 바로잡지 않는 한 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를 늘 부족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간극에서 죄의식이 자라나고, 그 격차를 좁히려 몸부림치다 결국 지쳐 쓰러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명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소명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소명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입니다.
하시디즘의 랍비 주즈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내게 '왜 너는 모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라고 묻는 게 아니라, '왜 너는 주즈야답게 살지 못했느냐?'라고 물을 것이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삶의 본질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평생 다른 누군가처럼 되려고 애쓰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모세도, 부처도, 공자도 되려 하지 말고, 오직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명입니다.
이것은 기묘한 선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던 때의 바로 그 모습인 자아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을 선뜻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그 선물을 외면하거나 감추어 두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함부로 써버리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떤 재능을 선물받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면, 갓난아기를 보십시오. 할아버지가 되어 손녀를 보면서 깨닫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존재로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장차 세상이 부여할 어떤 이미지로 만들어질 재료가 아닙니다. 아이는 이미 자기만의 형상을 선물받았으며 자기만의 숭고한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것을 참자아라고 했고, 어느 신앙공동체에서는 내면의 빛, 또는 각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며, 인문주의자들은 정체성이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너무나 고귀합니다.
갓난아기에게서 우리는 날 때부터 심어져 있는 성향과 기질을 봅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 모든 것이 이미 그 아이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인생의 절반을 그 재능을 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삽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는 별 상관없는 기대들에 둘러싸입니다. 가정, 학교, 직장, 종교 단체에서 우리는 참자아를 버리고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교육받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은 사회적 압력에 짓눌려 자기 본래의 형상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지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두려움에 내몰린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참자아를 배반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를 살면서 본래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눈을 뜨고 깨달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면, 나머지 후반의 인생을 바쳐 원래 갖고 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애씁니다.
손녀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서문이 있습니다. "네가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다.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어쩌면 이 기록이 할아버지가 훨씬 나중에서야 해낸 일을 네가 더 일찍 해낼 수 있도록 돕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참자아라는 선물을 되찾는 일 말이다."
소명은 멀리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듣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당신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당신을 당신이게 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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