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는 다른 나무가 되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려 합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특히 20대, 30대, 40대를 지나며 방향을 잃고 헤맬 때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겉보기에 고상하고 도덕적으로 보입니다. 마치 모세처럼 위대한 사명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줍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리를 바깥으로만 향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기대, 다른 사람들의 요구, 추상적인 도덕률을 쫓게 만듭니다.
진정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훨씬 더 어렵지만, 동시에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고유한 무언가, 그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도공이 물레 앞에 앉아 점토를 빚습니다. 이때 도공은 단순히 점토에게 "너는 이렇게 되어야 해"라고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숙련된 도공은 점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점토가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는지, 어떤 형태를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지, 어느 지점에서 무너지려고 하는지를 느낍니다.
만약 도공이 점토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만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과는 깨진 파편이거나 보기 흉한 물건일 것입니다. 점토와 도공의 대화, 그 상호작용 속에서만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고유한 재능과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점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입니다. 건축기사가 철, 나무, 돌의 특성을 무시한다면 건물이 무너지듯이,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삶도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때때로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줍니다.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사는 삶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억누르고 있는 삶 말입니다. 이것을 '꾸며대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삶이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본성을 유린하는 시도는 무지하고 건방진 일입니다. 아무리 그 일이 세상적으로 훌륭해 보여도, 그것이 진정한 나와 맞지 않는다면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의 공허함, 만성적인 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되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나'가 누구든 간에 말입니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 이 정의에서 주목할 부분은 순서입니다. 먼저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이 오고, 그 다음에 '세상의 요구'가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거꾸로 생각합니다. 먼저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고, 그 다음에 거기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명은 반대 방향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하면서 깊은 기쁨을 느끼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것, 그것을 할 때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 각자에게 심어준 독특한 선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선물이 완전히 꽃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에 도달합니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다시 관계로 이끕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공 상태의 자아란 없습니다. 나를 있게 한 부모님, 나를 키운 공동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 우리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내 안의 참자아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내가 속한 공동체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어떤 씨앗인지 알게 되면, 나를 심어야 할 토양이 어디인지도 알게 됩니다. 나의 고유한 재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 그 재능으로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각자는 씨앗과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안에 특정한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사과나무 씨앗은 아무리 노력해도 배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과나무로서는 완벽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내가 어떤 씨앗인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생태계를 찾는 것입니다. 어떤 씨앗은 햇빛이 가득한 곳에서 자라고, 어떤 씨앗은 그늘에서 더 잘 자랍니다. 어떤 씨앗은 메마른 땅에서도 견디고, 어떤 씨앗은 물기 많은 토양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씨앗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늘에서 자라는 씨앗이 햇빛 가득한 곳의 씨앗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위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이웃 사랑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이 계명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네 자신처럼"이라는 부분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의 필요를 무시하며 사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필요에 온전히 반응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사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사랑은 자기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재능과 한계를 알 때, 나의 기쁨과 슬픔을 인정할 때, 나의 고유한 본성을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씨앗과 생태계, 자아와 공동체를 모두 이해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엇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릅니까?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살아있다고 느낍니까? 어떤 활동이 당신에게 깊은 기쁨을 줍니까? 이 질문들은 쉽지 않습니다. 답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이 여정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명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진짜 당신을 발견하는 여정 말입니다.
그 여정에서 당신은 점토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기까지 갈 수 있어요. 이것은 내 본성에 맞지 않아요. 이렇게 할 때 나는 가장 아름다워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소명이 속삭이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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