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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02편 - 변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6.

"주님은 옛날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도 주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들은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시편 102:25~27, 새번역)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감각을 압니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방향을 모르겠고, 쓰러진 것도 아닌데 다시 일어설 힘이 없는 느낌입니다. 시편 102편의 기자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내 날이 연기처럼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다"고 고백합니다.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고, 탄식 소리에 뼈가 살에 붙을 만큼 수척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적 과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벼랑 끝에 선 사람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이상한 전환이 있습니다. 그 처절한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기자는 갑자기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그를 돌아서게 했을까요?

"내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이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노년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한창때라고 여겼던 나이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던 나이에,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고백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흔다섯에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집에는 갚아야 할 빚이 있었으며, 그는 막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었어요. 아직 끝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게 두려웠어요."

그 말이 시편 기자의 기도와 겹쳐 들립니다. 중년의 공포는 노년의 공포와 다릅니다. 노년이 "이제 저물었다"는 감각이라면, 중년은 "아직 다 살지 못했다"는 감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에 불로장생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사는 것, 더 많은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 답이 아니었습니다. 응답은 다른 방향에서 왔습니다.

26절은 아름답고도 서늘합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하늘과 땅이 낡습니다. 이 세계 전체가 언젠가는 헌 옷처럼 바래고, 구겨지고, 버려집니다. 그것이 우주적 현실입니다. 인간의 몸도, 문명도, 역사도, 그 긴 흐름 속에서 보면 다 한때의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자리에 앉아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마부는 죽어서 같은 곳에 있다. 위대한 자나 초라한 자나 죽음은 그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그는 이 허무를 철학으로 버텼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같은 진실 앞에서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예배로 나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지나가지 않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짧은 기도 하나를 남겼습니다. 훗날 익명으로 퍼져나가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른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가 변경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변경할 수 있는 일들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이 세 단어 수용, 용기, 지혜가 시편 102편의 구조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수용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습니다. 뼈가 타고 살이 붙고 잠이 오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수용이란 체념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첫 문입니다.

그다음 그는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선포(13절), 열방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할 것이라는 예언(15절), 그는 자기 고통의 한복판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은 소극적 생존이 아닙니다. 고통을 딛고 일어나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지혜에 이릅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눈입니다. 하늘과 땅은 낡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분별이 생기자 그는 더 이상 덧없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니버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한 번에 하루만 살게 하소서. 한 번에 한 순간만 즐기게 하소서." 우리는 종종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서 현재를 잃어버립니다. 시편 기자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무너졌고, 포로의 신음은 여전하며, 중년의 몸은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찬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어느 수도원의 노수사가 젊은 수련생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제는 어디 있느냐?" 수련생이 답했습니다. "지나갔습니다." 노수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내일은 어디 있느냐?" 수련생이 답했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노수사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네가 가진 전부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라." 시편 102편의 기자가 얻은 것은 연장된 날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눈이었습니다.

니버의 기도 중 가장 어려운 구절이 있습니다.
"이 죄 많은 세상을, 제가 원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이 실패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에 있고, 내가 세운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따집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시편 기자도 따졌습니다. 그러나 그 따짐의 끝에서 그는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지, 내 계획의 집행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인정이 수용입니다. 굴복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시편 102편은 절망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자의 처지는 그대로였고, 세상은 여전히 낡아가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그의 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덧없는 것들이 더 이상 그를 집어삼키지 못했습니다. 고통은 남아 있었지만, 그 고통이 마지막 말이 아니었습니다. 수용, 용기, 지혜, 이 세 가지는 인간이 스스로 길러내는 덕목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분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