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것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편 104:24)
어릴 적 나는 자연이 교실인 줄 몰랐습니다. 매미가 울고, 개울물이 흐르고,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던 그 모든 광경이 그저 배경이었을 뿐, 거기서 누군가 나를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실은 칠판이 있고 선생님이 있고 시험지가 있는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배움'이라는 말을 너무 좁은 공간 안에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닐까요?
시편 기자는 전혀 다른 교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편 104편은 창조의 파노라마입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주님은 빛을 옷처럼 두르시고, 하늘을 장막처럼 펼치시며, 구름을 병거 삼아 달리십니다. 이 장엄한 서두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이 모든 광경 뒤에서 한 분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창조 세계는 그분의 교실이요, 각각의 피조물은 그분의 언어로 쓰인 교과서입니다.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물이 있습니다. 주님이 꾸짖으시매 달아나고, 낮은 곳으로 흘러 각 생명에게 제자리를 내어주는 물입니다. 들짐승이 마시고, 들나귀가 갈증을 풀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 깃들어 노래합니다(시 104:10~12).
이 물의 흐름 안에 어떤 지혜가 담겨 있는가? 물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물은 자기 자리를 다투지 않습니다. 그저 낮은 곳으로, 필요한 곳으로, 생명이 있는 곳으로 흐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실에서 배우는 창조의 언어입니다.
인간의 교실에서는 다른 언어를 가르칩니다. 누가 더 빠른가,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가, 누가 더 많이 아는가? 이 언어는 눈부신 결과물을 낳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모방과 경쟁의 역사는 찬란한 문명을 세우면서도 그 문명 안에서 수많은 사람을 소외시켰습니다. 지식은 쌓였으나 지혜는 줄었고, 정보는 넘쳐났으나 사랑은 희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가장 깊이 사람을 변화시킨 배움은 대개 교실 밖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혁명가로 불리는 비노바 바베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형성한 것은 학교의 교육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받은 감화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체격이 건장한 거지가 그의 집 문 앞에 서자,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먹을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어린 비노바는 참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저런 사람에게 적선하면 게으름만 키워 줄 뿐이에요." 그러자 어머니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우리가 뭔데 누가 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단 말이냐. 내 집 문전에 선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다 신처럼 받들고 힘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실에서 일어나는 수업입니다. 칠판도 없고 시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비노바의 평생을 결정했습니다. 판단이 아닌 환대, 심사가 아닌 섬김, 자격 심사가 아닌 무조건적 사랑이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원리이며, 시편 기자가 창조 세계를 바라보며 배운 지혜였습니다.
시편 104편 27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님의 교실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학생입니다. 사자도 젊은 사자들도 하나님께 먹을 것을 구하며 부르짖습니다(21절). 해가 지면 사자가 나와 먹이를 찾고, 해가 뜨면 물러가 굴에 눕습니다. 이 리듬은 누가 가르쳤는가? 교과과정이 있었는가?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 하나하나에게 그 때와 분량을 아시고 친히 채우십니다.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의 몫을 빼앗으려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 안에는 약육강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큰 그림 안에서 전체는 균형을 이루고, 생명의 순환은 계속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 균형을 보면서 경외했습니다. 이것은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섭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자녀들은 어느 교실에 앉아 있는가?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학원을 전전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아이들이 하루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부모의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저녁 식탁에서 가족과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은,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믿으면서, 정작 하나님의 교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노바의 어머니는 위대한 교육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한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의 일생을 바꾸었습니다. 부모와 공동체의 어른들은 주님이 다음 세대를 위해 세우신 사랑의 조교들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베푸는 방식, 용서하는 방식, 기도하는 방식이 아이들에게는 살아있는 교과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묵상이 주께 아름답기를 바라나니 나는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34절) 묵상(시아흐), 그것은 깊이 들여다보며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고, 공동체를 보고, 삶의 매 순간을 보면서, 거기서 창조주의 손길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의 본질입니다.
모방의 능력과 지식은 인간의 교실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지혜와 사랑의 능력은 하나님의 교실에서만 옵니다. 오늘, 그 교실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빛이 옷처럼 펼쳐지는 아침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시냇가마다, 누군가 문 앞에 서서 손을 내미는 그 순간마다, 주님은 여전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교실에 앉을 줄만 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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