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시편 106:6)
어떤 목자를 따르느냐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양은 목자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매 순간 선택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누구의 손짓을 따라 발을 옮기는가, 그것이 곧 목자를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목자였지만, 그들은 날마다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달콤했습니다.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파멸시켰습니다.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낭독하는 시편이 아닙니다. 차라리 거울입니다. 읽는 자가 자기 얼굴을 보아야 하는 거울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도 조상들처럼 죄를 지었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다"(6절). 이 한 문장 속에서 수백 년의 역사가 응축됩니다.
홍해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도 금방 원망했고(7절), 광야에서 배를 채우자마자 하나님을 잊었으며(13절),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이방 신들과 동침하듯 뒤섞였습니다(35절).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다 → 잊는다 → 욕망을 따른다 → 심판이 온다 → 부르짖는다 → 구원을 받는다 → 다시 잊는다'. 이 순환이 48절 내내 끊이지 않습니다.
그 순환의 중심에 바알이 있었습니다. 바알은 풍요와 쾌락의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으로, 비를 내리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가축을 번성하게 해준다고 선전되었습니다. 그 신전에서 벌어지는 의식은 먹고 마시고 성적으로 탐닉하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 말씀은 자기를 제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반면 바알은 지금 당장 쾌락을 보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그 목소리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었도다"(28절). 선택은 자유로워 보였지만,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그들 중에 유행하였도다"(29절).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바알은 신전에 앉아 있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 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 속에 있습니다. 넷플릭스 추천 목록 속에, 인스타그램 피드 속에, 새벽 두 시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보는 영상 속에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매일 수백 번 반복됩니다. '본능에 충실해라.' '재미있으면 좋은 거다.' '예쁘면 다 용서된다.' '좋아하면 뭐든 해라.' '돈이건 권력이건 갖고 보자.' '실연과 고민은 술과 약으로 달래라.' '사랑은 꼬일수록 매력적이다.'
이 메시지들은 교회 밖에서만 울리지 않습니다.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귓속에서도 윙윙거립니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말입니다. 바알은 우리의 목자로 이미 상당히 성공적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 목자입니다. 삯꾼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삯꾼의 현대판입니다. 이리가 오면 달아나는 자입니다. 자기가 선전한 메시지대로 살다 무너진 이들을 단 한 명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쾌락을 따르라고 속삭이던 드라마는, 그 말대로 살다 가정이 파괴된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본능에 충실하라고 외치던 광고는, 중독된 이의 손을 잡아주지 않습니다. 바알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약속하고, 취하게 하고, 버릴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기자의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자백입니다. "우리도 조상들처럼 죄를 지었다"(6절). 이 문장의 핵심은 '우리도'와 '조상들처럼'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조상들의 실패를 남의 이야기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우리도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수백 년 전 광야 세대의 패역함이 곧 자신의 패역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의 시작점입니다.
회개는 흔히 오해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감정의 문제로 이해합니다. 눈물이 나면 회개한 것이고, 눈물이 없으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결심의 문제로 이해합니다. '앞으로 잘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면 회개가 완성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실한 죄책 고백이 빠진 회개는, 시편 기자의 언어를 빌리자면, 불쾌한 농담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친구를 이용했습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친구가 힘들 때는 외면했습니다. 어느 날 그 관계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전화를 걸어 말합니다. "야, 나도 요즘 힘들어.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됐네. 어쨌든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이것은 사과가 아닙니다. 회개는 더욱 아닙니다. "내가 너를 이용했다. 네가 힘들 때 나는 없었다. 그 잘못이 나에게 있다." 이 자백이 없다면, 나머지 말은 모두 공허합니다. 죄책을 인정하지 않는 화해 제스처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좇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데 능숙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면 더 안전하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죄는 언제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은 그 합리화의 언어를 걷어내고, 빗나간 죄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바알 탓이 아닙니다. 시대 탓이 아닙니다. 환경 탓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했습니다. 내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내가 따라갔습니다.
그 고백이 회개의 첫 문장입니다. 시편 106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47절에서 기도가 터집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48절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판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조상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회개는 그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입니다. 바알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거짓 목자의 목소리에서 귀를 닫고, 참 목자의 음성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바알이 절대 하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끝까지 책임지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진짜 회개는 그 복음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죄책을 직면할 수 있는 것은, 그 죄를 담당하신 분이 이미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농담이 아니려면, 먼저 내 죄가 농담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지신 분이 진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편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편 105편 -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0) | 2026.04.03 |
|---|---|
| 시편 104편 - 주님의 교실에서 배우는 창조와 사랑 (0) | 2026.03.30 |
| 시편 103편 - 젊음이 독수리처럼 (0) | 2026.03.28 |
| 시편 102편 - 변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 (0) | 2026.03.26 |
| 시편 101편 -완전한 길을 향한 신앙의 여정 (0) | 2026.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