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편 100:1~5)
어느 날 오후, 한 중년 여성이 교회 예배당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해 봄에 남편을 잃었고, 여름 내내 아들의 사업 실패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으며, 가을에는 본인 건강에도 이상 징후가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주보가 들려 있었고,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찬송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물과 찬송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왜 이 순간 슬픔과 기쁨이 함께 뒤섞이는지 그녀 자신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시편 100편의 시편 기자는 외칩니다.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1~2절). 이 시는 왕의 즉위식 때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주님 앞으로 그분의 백성이 행진하며 나아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 행진이 기쁨의 행진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억지 발걸음이 아니라,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행진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봅시다. 우리의 예배가 늘 그렇습니까?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직장의 압박, 관계의 상처, 채워지지 않는 갈증, 막막한 미래,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일요일 아침 예배당 문을 여는 우리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기쁨은커녕, 그저 습관처럼, 혹은 의무감으로 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무거운 발걸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선포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5절). 기뻐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기뻐할 이유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형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 둘 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차이의 이유를 논해 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히 11:4).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면, 솔직히 우리는 가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지만 마음이 흩어져 있고, 입술은 찬양하지만 생각은 딴 곳에 있으며, 헌금을 드리지만 그 손에 온전한 신뢰가 담겨 있지 않은 날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스스로 압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드리는 우리를, 아벨을 받으시듯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말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의 어느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수천 명의 죽음을 목격했고, 가족도 잃었으며, 육신도 망가진 채 귀환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믿음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귀환 후 첫 주일, 가장 먼저 교회로 향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그 지옥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답 속에 예배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상황이 좋아서 드리는 감사의 보고가 아닙니다. 삶이 무너지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그 자리에서, 그래도 주님이 선하시다는 고백을 붙드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때로 울면서 드려집니다. 그러나 그 눈물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문 앞의 그 중년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빈자리가 채워졌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온 땅의 주권자이신 그분의 손 안에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는 그 기억을 다시 붙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실상이 얼마나 부족하든, 우리가 얼마나 지쳐 있든, 주님은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 은혜가 너무 사무쳐서, 눈물이 나면서도 기쁩니다. 기쁘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울며 기뻐할 거룩한 은혜요, 평생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 특권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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