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편 99:1~9)
어떤 왕이 진정으로 위대합니까? 역사책을 펼치면 수많은 왕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했고, 솔로몬은 지혜로 이름을 떨쳤으며, 진시황은 만리장성으로 자신의 위용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정복한 땅은 흩어졌고, 쌓아 올린 영광은 바람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왕이란 결국 시간 앞에 무릎 꿇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99편의 시편 기자는 전혀 다른 왕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1절) 왕이신 주님 앞에서 땅이 흔들립니다. 이것은 공포의 묘사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실재 앞에 선 피조물의 반응입니다.
마치 처음으로 드넓은 바다를 마주한 사람이 말을 잃고 서 있는 것처럼, 혹은 밤하늘 가득한 은하수 아래에서 자신의 작음을 문득 깨닫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그 압도적인 임재 앞에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거룩하다!" 이 단어가 시편 99편의 심장입니다. 3절, 5절, 9절, 마치 종소리처럼 세 번 울려 퍼집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말의 뜻은 '다르다', '구별되다'입니다.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에서 전직 독재자의 재판 장면을 보았습니다. 수십 년간 나라를 철권으로 다스렸던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통치가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증인들의 증언은 달랐습니다. 광장에서 학살된 청년들, 밤중에 끌려간 아버지들, 돌아오지 못한 어머니들, 권력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했고, 백성은 그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왕들의 통치입니다. 역사는 예외 없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주님의 통치는 다르다고 노래합니다. 그 기초는 공평이고, 그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야곱의 자손들에게 주님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셨습니다(4절). 여기서 공평과 정의는 추상적인 철학 개념이 아닙니다. 힘없는 자를 짓밟지 않는 통치, 권력자의 편이 아닌 진실의 편에 서는 다스림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왕들과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가장 깊이 경탄하는 주님의 거룩함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선택'에서 드러나는 거룩함입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자였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늙은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교묘한 수단으로 양 떼를 늘렸습니다. 신앙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삶의 밑바닥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세속적인 욕망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새 어떤 존재와 씨름했습니다. 동이 틀 무렵, 그 존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야곱은 절뚝이면서도 놓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사람이 살아남은 사례는 이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야곱은 그 씨름에서 이기고도 절뚝이며 걸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이겨 먹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연약함을 몸에 새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그 평생 절뚝이는 걸음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영리하고 능력 있는 자가 아니라, 간사하고 연약하며 결국 자신의 한계 앞에 무너진 자를 말입니다. 이것이 선택의 거룩함입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기준과 완전히 다른 선택, 그 다름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광야의 어느 날,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모세는 신을 벗었습니다. 이 단순한 동작 하나가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맨발로, 무방비로 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 앞에 서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집트 왕자였다가 도망자가 된 사람, 사십 년의 광야 생활로 자존심의 마지막 조각까지 닳아버린 사람, 그 모세가 신을 벗는 순간, 그는 진정한 제사장 나라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아론도 함께였습니다. 형제는 함께 바로 앞에 섰고, 함께 광야를 걸었으며,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내 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을 벗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비전을 온몸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그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개인적인 상처와 실망을 넘어 주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부패하여 지도자의 자격을 잃었음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상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순한 민족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거룩한 구속의 이야기임을 가장 선명하게 증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를 마치며 다시 한번 외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거룩하시도다!"(9절) 이 고백은 단순한 찬양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처럼 신을 벗어야 할 거룩한 자리 앞에서 망설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 나라보다 '내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고개를 듭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왕께서 공평과 정의로, 선택과 은혜로, 인간의 논리를 훌쩍 넘어서는 방식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 거룩한 왕을 온 세상의 통치자로 믿는다면, 우리 또한 삶의 자리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내 계획, 내 욕망, 내 왕국을 주장하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맨발로, 그 거룩한 임재 앞에 서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결국,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움켜쥐지 않고, 거룩한 왕처럼 내어주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논리로, 오늘 이 자리를 걷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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