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편 117:1~2)
어느 날 한 목사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술대에 오르기 전날 밤, 그는 홀로 병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속에서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주님,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 아직 혼인을 앞둔 자녀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 시작도 못 한 교회의 계획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다 전하지 못한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들이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어찌하라고요?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하고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종아, 별것을 다 걱정하는구나. 네가 늘 부르는 찬송을 잊었니?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내가 너에게 이래도 저래도 복을 주었다. 살아도 복, 죽어도 복. 건강해도 복, 병 들어도 복. 너의 생명은 오직 내 손 안에 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주어진 시간 동안 너의 사명에 충성을 다해라." 고훈 목사가 암 수술 후에 쓴 글 '주님과의 대화'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 짧은 대화 속에, 시편 117편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시편 117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시편입니다. 단 두 절, 17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시편은 성경 전체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신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가장 짧은 말씀이 가장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 이미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길이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놀라운 초대입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 히브리어로 고임, 즉 이방인들까지 포함한 온 세상을 향한 찬양의 부름입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찬양해야 합니까? 시편 기자는 단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 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씨름해 왔습니다. 사랑, 은혜, 긍휼, 신실함, 언약적 사랑, 어떤 한 단어도 헤세드를 다 담지 못합니다. 그것은 계약보다 깊고, 감정보다 단단하며,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공동번역은 이것을 "그의 사랑 우리에게 뜨겁고"라고 옮겼습니다. 뜨겁습니다. 차갑지 않습니다. 식지 않습니다. 그것이 헤세드입니다.
그리고 진실하심은 히브리어로 에메트입니다. 참됨, 신실함, 영원한 변함없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신 분, 이 두 가지, 헤세드와 에메트가 찬양의 이유입니다. 찬양은 본래 좋은 날에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사업이 잘 될 때, 건강이 좋을 때, 자녀가 잘 자랄 때,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 그때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삶이 항상 그런 날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871년, 미국의 법률가이자 사업가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큰 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해 겨울, 그는 가족을 먼저 배에 태워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던 그 배가 다른 선박과 충돌했고, 스패포드의 네 딸이 모두 바다에 잠겼습니다. 아내만 간신히 구조되었습니다. 아내의 전보는 단 두 단어였습니다. "나만 살아 있소."
스패포드는 즉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선장은 그에게 조용히 알려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곳이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바다 한가운데서, 스패포드는 펜을 들었습니다. "내 평안 강 같으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 미치리 나에게." 이것이 찬송가 '내 평안 강 같으리'의 탄생입니다. 그는 좋은 날에 이 노래를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딸을 잃은 그 바다 위에서 썼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그가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상황이 바뀐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에메트는 우리의 형편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고훈 목사는 그날 밤, 찬양을 생각했다기보다 걱정을 쏟아냈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머니 걱정, 자녀 걱정, 아내 걱정, 교회 걱정,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걱정합니다. 그러니 걱정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부드럽되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 말이 핵심입니다. 걱정의 영역을 내가 들고 있으면 짐이 되고, 하나님께 드리면 기도가 됩니다.
찬양은 바로 내 손에서 주님의 손으로, 내 영역에서 그분의 영역으로 이양의 행위입니다. "살아도 복, 죽어도 복. 건강해도 복, 병 들어도 복."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뢰입니다. 헤세드를 아는 자만이 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뜨겁고, 그분의 진실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뼛속까지 믿는 자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습니다.
시편 117편은 단 두 절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단호합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어로 할렐루야는 명령형입니다. 지금 여기서 찬양하십시오, 이 상황에서 찬양하십시오. 조건이 갖추어지면 찬양하겠다는 것은 결국 찬양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찬양하십시오. 이래도 찬양하고, 저래도 찬양하십시오. 살아도 주님을 찬양하고, 죽어도 주님의 이름으로 가십시오. 건강할 때 주님을 높이고, 병들었을 때 주님께 기대십시오. 기쁠 때 노래하고, 슬플 때도 노래하십시오. 그 노래가 때로 눈물에 젖더라도 괜찮습니다. 다윗도 그랬고, 스패포드도 그랬고, 고훈 목사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잔소리하거나 훈수 두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잠깐 멈추어 생각하십시오.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그 일을,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 미래를, 그분은 이미 손에 쥐고 계십니다. 헤세드가 뜨겁고, 에메트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감사하며 사십시오. 찬송하며 사십시오. 이래도 저래도, 그것만으로도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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