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시편 119:25)
어느 오래된 목공소 이야기입니다. 그 집 장인은 제자들에게 연장을 쥐여 주기 전에 반드시 한 가지를 먼저 가르쳤습니다. 연장 다루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를 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무의 결을 읽어라. 눈으로만 보지 말고, 손으로 쓸어 보고, 귀를 가까이 대고 들어라." 처음엔 제자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연장질을 익혀야 할 시간에 왜 나무 앞에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오래된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시간이 제 손을 만들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말은 입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마음 안에서 오래 자라고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는 들리지 않을수록 좋은 말들이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상처를 주는 폭언만이 아닙니다. 훨씬 더 일상적이고, 그래서 더 무서운 말들이 있습니다. "잘해 봐"라는 비꼬는 말, "난 몰라"라는 무책임한 말, "해봐야 안 될 걸"이라는 부정의 말, "네가 뭘 안다고"라며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 "바빠서 못 해"라는 핑계의 말, "별일도 아닌데 놔 둬"라는 안일한 말, "이 정도면 됐지"라는 타협의 말, "다음에 하자"며 미루는 말, "해보나마나 똑같아"라는 포기의 말, "이제 그만두자"고 의지를 꺾는 말입니다.
이 말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단 한 마디도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말은 정보가 아닙니다. 말은 그 사람이 무엇을 품고 사는지를 드러내는 창입니다.
어린 시절, 공부가 유독 힘들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마다 "이 아이는 좀 어렵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한 선생님만은 달랐습니다. 그 선생님은 틀린 답지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했구나. 다음 한 걸음만 더 가 보자." 아이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나를 만든 게 아닙니다. 그 선생님의 말이 내 안에 남아서 나를 만들었습니다." 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말은 듣는 이의 마음속에 씨앗처럼 내려앉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19:25). 이것은 극도로 낮아진 자의 고백입니다. 진토, 곧 먼지와 티끌에 영혼이 달라붙은 상태입니다. 기력이 빠지고, 의욕이 꺾이고, 무언가를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를 압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날, 무슨 말을 해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 기도조차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주님의 말씀을 향해 귀를 돌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립니다"(119:27). 히브리어로 '시아흐'라는 단어입니다. 묵상하다, 되새기다, 중얼거리다는 뜻입니다. 소리내어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마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 주님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사막 교부들은 이것을 '렉시오 디비나', 거룩한 독서라고 불렀습니다. 빠르게 읽어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한 구절을 입에 올려놓고 천천히 씹듯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물의 힘이 아닙니다. 반복입니다. 말씀도 그렇게 영혼 깊은 곳으로 스며듭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두 사람 다 상처받은 가정에서 자라 왔습니다. 칭찬보다 비판이 익숙하고, 격려보다 무시가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말싸움이 잦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서로에게 쏟아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두 사람이 함께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아침마다 읊조리기로 했습니다. 거창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밥상에 앉기 전, 한 구절을 읽고 잠시 침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일 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말투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온도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말씀이 안에서부터 무언가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말의 변화는 연습이 아닙니다. 채움입니다. 더 좋은 말을 하려고 입술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마음을 채울 때, 말은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마음이 먼저입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하소서"(119:43). 이 기도의 무게를 느껴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말씀이 자기 입에서 떠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자주 읽겠다는 다짐이 아닙니다. 말씀이 자신의 언어가 되고, 자신의 숨결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샘물은 안에서 솟습니다. 샘물이 흐르는 이유는 밖에서 물을 부어 넣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이 생명이 되려면, 먼저 생명의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달라집니다. 교회의 대화가 달라집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말, 일으켜 세우는 말, 소망을 심어 주는 말들이 가득해집니다.
오늘, 당신이 누군가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오늘 주님의 말씀을 읊조려 보십시오. 그 말씀이 당신 안에서 자라나,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말이 되어 흘러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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