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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19편 - 고난 중에 말씀에 붙들리면 산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2018년 겨울, 강원도 어느 산간 마을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쏟아진 눈은 길을 막았고, 마을은 섬처럼 고립되었습니다. 그 마을 어귀에 혼자 사는 칠십 대 노인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오래전 도시로 떠났고, 아내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밖으로 허연 눈만 가득한 그 방에서, 노인은 무릎 위에 낡은 성경 한 권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난방도 시원찮고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을 터이지만, 노인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공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구조대가 들어왔을 때,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 읽다 보니 사흘이 갔어요." 세상이 막혀도 말씀은 막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스물두 자로 구성된 장대한 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는 49절부터 72절까지는 그 가운데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 연에 해당합니다. 세 연의 첫 글자는 각각
'자인', '헤트', '테트'입니다. 히브리 시편 기자는 알파벳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짚어 가며 시를 지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문학적 유희가 아니었습니다. 언어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주님의 말씀을 노래하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배경은 평온한 봄날 오후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시편 기자를 조롱하고, 악인들이 올무를 놓습니다. 나그네처럼 낯선 땅에서 떠돌고, 비방을 받아 억울하게 짓눌립니다. 고난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삶의 배경처럼 깔려 있는 상황입니다. 그 속에서 시편 기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기억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였습니다. 4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소망을 주셨나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 고난 중에 과거를 붙잡습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하셨던 그 약속, 들었던 그 말씀, 마음에 새겨졌던 그 구절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감상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행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가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기억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전에 들었던 약속을 잊어버리고, 지금 이 고통만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기억을 붙듭니다.

어느 중년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집을 잃고, 아이들 학비도 막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작은 수첩 하나를 펼쳤습니다. 수첩 안에는 지난 몇 년간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꽂혔던 구절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씀들을 읽을 때만, 내가 지금 이 상황보다 더 큰 무언가 안에 있다는 걸 느꼈어요." 기억은 현재를 더 넓은 이야기 속에 위치시킵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고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보다 큰 진실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것, 그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54절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주의 율례들이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내 노래가 되었나이다." 나그네 된 집이란 자기 집이 아닌 곳, 낯설고 외로운 곳입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뿌리가 뽑힌 상태입니다. 고향이 없고, 안정이 없고, 편안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노래가 나옵니다. 말씀이 노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노래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노래는 기쁠 때 나오는 것이지, 울고 싶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다릅니다. 말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노래가 상황에서 오지 않고 말씀에서 옵니다. 노래의 출처가 바뀐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찬송을 불렀다는 이야기(행 16:25)는 이 시편 기자의 삶과 정확하게 포개집니다. 발이 착고에 채이고 등은 채찍에 찢긴 상황에서 나온 그 노래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살아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노래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노래를 지켰습니다.

감사하는 것, 그것이 세 번째였습니다.
62절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주의 의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내가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밤중에 일어난다는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 밤은 더 깊어집니다. 낮에는 바쁘게 움직이며 버틸 수 있지만, 밤이 되면 온갖 생각이 몰려옵니다. 시편 기자도 그 밤의 무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그가 하는 일이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고난이 없어져서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고난 안에서, 여전히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감사입니다.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선이 바뀐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던 시절, 가장 힘든 것은 새벽 두세 시에 몸이 너무 아파서 잠을 자지 못할 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 그 분은 자신의 지난 삶 속에서 주님이 지켜 주셨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감사할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감사가 나왔어요. 그 시간이 저를 살렸어요." 밤중의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씀의 진실을 붙잡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배우는 것, 그것이 네 번째였습니다. 71절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 구절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도, 고난 그 자체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말씀을 붙잡았더니, 말씀을 더 깊이 배우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평탄할 때 우리는 말씀을 머리로 읽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면 말씀은 전혀 다른 층위에서 읽힙니다. 고난은 말씀을 삶 속으로 밀어 넣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이 교사가 아니라, 말씀이 교사입니다. 고난은 다만 말씀의 교실로 우리를 밀어 넣는 상황일 뿐입니다.

한 신학생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내내 요한복음 11장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을 수십 번 읽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로 들린 것은,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날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 밤 그 말씀이 가슴을 파고들었을 때, 그때 처음으로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했습니다. 고난은 말씀을 피부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편 기자의 길을 따라, 고난을 만날 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뭉치는 것도 아니고, 술로 잊으려 드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비관하며 주저앉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노래하고, 말씀 앞에서 감사하고, 말씀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고, 지혜를 주고, 바른 길로 통과하게 합니다. 고난에 붙잡히면 죽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붙들리면 삽니다.

강원도 그 폭설 속의 노인이 말씀을 펼쳐 들었던 것처럼, 빌립보 감옥의 바울이 밤중에 찬송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 당신 앞에 놓인 고난의 자리에서 먼저 말씀을 펼쳐 드십시오. 그 말씀이 당신을 붙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