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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20편 - 순례자의 노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9.

"내가 화평을 말할지라도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편 120:7)

법정 스님의 책 『홀로 사는 즐거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던 무렵, 여든 살이 넘은 노스님 한 분이 히말라야를 맨몸으로 넘어 인도로 피신해 왔습니다.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달려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연세에 그 험한 산을 넘어오셨습니까?" 노스님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었습니다. 히말라야를 한꺼번에 넘은 사람은 없습니다. 에베레스트도, 다울라기리도, 사람의 다리는 언제나 한 걸음씩 내딛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한 걸음씩 걸어가는 사람은 결국 어디든 도착합니다.

시편 120편은 이른바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120편부터 134편까지 열다섯 편의 시편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120편의 순례자가 처음 발을 내딛는 장소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
메섹"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메섹은 흑해 연안의 이방 민족이 사는 땅이었고, "게달"은 아라비아 사막의 호전적인 유목민 부족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두 곳을 나란히 불러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 사이에서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거짓이 횡행하는 곳, 폭력이 언어를 대신하는 곳, 순례자는 바로 그런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순례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메섹과 게달은 있습니다.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교묘한 거짓말들, 진실보다 유리한 말이 더 빨리 퍼지는 조직의 문화, 힘 있는 자의 논리가 옳음을 대체하는 사회의 풍토, 이런 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은 서서히 지쳐 갑니다. 거짓에 맞서 싸우다 거짓을 닮아 가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냉소로 굳어 버리거나,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순례자도 그 질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싸우는 대신 걷기로 했습니다. 거짓과 폭력의 자리에 더 오래 머무르며 그것들을 바꾸려는 대신, 주님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로 했습니다. 그 한 걸음이 순례의 시작이었습니다. 순례자가 걷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도망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메섹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거짓말하는 이웃이 있고, 폭력적인 말이 오가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순례는 장소의 탈출이 아니라 방향의 선택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존자들 사이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용소를 탈출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도 의미를 향해 걸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환경이 어떠하든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랑클은 그것을 "
마지막 인간의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순례자의 자유도 그것입니다.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진실을 향해 걸을 수 있는 자유,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도 평화를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자유, 순례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불편하더라도 익숙하면 떠나기가 두렵습니다. 사람은 나쁜 것에도 적응하고, 불의한 것에도 길들여집니다. 그 익숙함의 무게가 발목을 붙듭니다. 순례자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 무게를 한 겹씩 벗어 냅니다.

두려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변화는 언제나 불확실함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나서야 걸을 수 있다면, 순례는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걷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걷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 알지 못해도 방향을 신뢰하며 걷는다는 뜻입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카미노 데 콤포스텔라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전해집니다. "
카미노가 당신을 치유한다." 처음 그 말을 들으면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을 걸어 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치유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에 물집이 잡히고 다리가 무겁고 더 이상 걷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그 순간에 찾아온다고 말입니다. 몸이 한계를 말할 때 의지가 한 걸음을 더 내딛고, 그 한 걸음이 쌓여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만난다고 합니다.

시편의 순례자도 그렇게 걸었을 것입니다. 메섹의 거짓말이 등 뒤에서 따라오고, 게달의 폭력이 앞에서 으르렁댈 때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걷는 동안 그는 자유를 배웠고,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메섹에서 눈을 뜹니다. 어떤 이는 거짓이 판치는 직장에서, 어떤 이는 폭력적인 언어가 오가는 관계 속에서, 어떤 이는 오래된 두려움과 상처의 골짜기 한가운데서 아침을 맞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순례자는 목적지를 한 번에 도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입니다. 히말라야를 넘어온 노스님처럼, 한 걸음, 또 한 걸음, 허리띠를 동이고 신발 끈을 묶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향해, 평화를 향해,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그 한 걸음이 쌓이면, 우리는 어느 날 고개를 들어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께로부터로다." (시편 1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