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19편 145~176절
"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화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편 119:165)
1882년, 중국 봉천의 어느 허름한 방 안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의주에서 온 상인들이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함께 조선말로 성경을 옮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상인이었습니다. 신학자도 아니었고,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장사를 하러 압록강을 건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에 붓이 들렸고, 그 붓 끝에서 한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복음이 선교사보다 먼저 조선 땅에 들어오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4년, 서양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입국했을 때,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조선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보다 빨랐습니다. 책 한 권이 국경을 넘었고, 그 책이 사람의 마음을 열었으며, 열린 마음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로스 목사가 고조선의 옛 땅, 즙안의 한인촌 계곡에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던 그날의 감동을 그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어제는 이교도였지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기뻐하는 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다만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 바로 말씀 앞에 선 인간의 자리입니다.
시편 119편의 마지막 두 연, 145절에서 176절은 바로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온 마음으로 주께 부르짖는다"(145절). 반쪽짜리 마음이 아닙니다. 계산이 섞인 마음도 아닙니다. 온 마음입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나 부르짖고(147절), 밤이 깊어도 주의 말씀을 묵상합니다(148절). 왜 그토록 간절합니까?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150절). 악인들이 가깝고, 조롱하는 자들이 가깝고, 위협이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다, "주께서도 가까이 계신다"(151절)는 것을 말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원수도 가깝고 주님도 가깝습니다. 위기도 가깝고 구원도 가깝습니다. 시편 기자가 낙망하지 않는 것은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영원히 세우신 것"이요(152절), 처음부터 "진리의 기초 위에 세운 것입니다"(160절).
이런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1950년대 한국전쟁 중, 한 피란민 여인이 폭격으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피란지에서 그녀는 날마다 그 성경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울고, 울다가 또 읽었습니다. 훗날 그 자녀들은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무서워하지 않으셨어요. 슬퍼하셨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어요." 무엇이 그 두려움을 거두어 갔습니까?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은 그 여인에게 상황을 바꿔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되어 주었습니다.
시편 기자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160절). 말씀은 일부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그 강령, 즉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가 진리입니다. 상황이 좋을 때만 작동하는 진리가 아니라, 가장 어두운 밤에도 꺼지지 않는 진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인해 하루에 일곱 번 주를 찬양한다고 합니다(164절). 일곱 번은 숫자의 정확성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리는 찬양의 표현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잠자리에 들면서, 하루의 매 순간이 감사와 찬양으로 물드는 삶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 삶이 열립니다.
"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화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165절). 여기서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단순한 평온함이 아닙니다. 어떤 결핍도 없는 온전한 충만함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자는, 폭풍 속에서도 샬롬을 누립니다. 파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파도 아래에 반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은 낭만적인 종결을 거부합니다. 마지막 절인 176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는 잃어버린 양 같이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위대한 찬양의 시가 '길 잃은 양'의 고백으로 끝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은 실패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나는 스스로 돌아올 수 없다. 나는 주님이 찾아오셔야만 하는 존재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다. 내가 말씀을 기억하는 한, 주님은 나를 찾아오신다. 말씀이 나와 주님을 연결하는 끊어지지 않는 줄이기 때문이다."
로스 목사가 계곡에서 세례를 준 그 75명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은, 갓 믿음에 들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로스는 그들을 떠나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고 돌아왔다." 이보다 더 안전한 품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은 어제의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늘도 살아 움직이며, 오늘도 사람을 찾아오고, 오늘도 무릎을 꿇게 하고, 오늘도 기쁨을 터뜨립니다. 의주 상인의 붓 끝에서, 즙안 계곡의 세례물에서, 피란지 여인의 눈물 속에서,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조용한 방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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