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 121:1~8)
깊은 밤, 병원 복도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술실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내가, 혹은 자녀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돈도, 인맥도, 지위도 아무 소용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는 그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들 뿐입니다. 어디를 향해서인지도 모른 채, 그저 위를 향해 눈을 듭니다. 시편 121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먼 길을 걸어 시온 산을 향해 오르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광야의 먼지 속에서, 도적이 출몰하는 산길을 걸으며, 그들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성전이 있는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했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산'을 향해 눈을 드는 것입니까?
그것은 막연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는 실제로 성전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거기,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 제사와 용서와 언약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장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어떤 신이든 좋으니 도와주세요'라는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께로 시선을 고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합니다.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신앙이란 것이 나약한 자들의 심리적 위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그 어떤 힘과 권력으로도 통과할 수 없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거느렸던 알렉산더 대왕은 서른두 살에 죽었습니다. 그는 임종 자리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내 관을 운구할 때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놓아라. 세상을 정복한 자도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보여라." 권력이 닿지 않는 문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육신의 문제 해결과 동일시합니다. 사업이 잘 되는 것, 병이 낫는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도움이 오직 이 수준에 머문다면, 신앙은 언제나 불안정한 것이 됩니다. 사업이 망하면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은 것이 되고, 병이 낫지 않으면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이 됩니다.
실제로 신자도 불신자와 다를 바 없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암에 걸리고, 자녀가 방황하고, 노년에 쓸쓸히 살아갑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의 고백인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는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요?
저자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고대 근동에는 잠드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갈멜 산에서 바알이 응답하지 않자 "혹 잠이 들어 깨워야 할 것이라"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왕상 18:27). 신도 피곤해서 조는 신들의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졸지 않으십니다. 주무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이 고백의 무게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당신의 백성에게서 시선을 거두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낳았습니다. 처음 며칠 밤은 아이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잠잠하면 달려가 확인했습니다. 그 사랑은 아이가 인식하기 훨씬 전부터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지키심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기 전부터, 우리가 감사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지키고 계셨습니다.
5절은 아름다운 표현을 씁니다.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팔레스타인의 뙤약볕은 가혹합니다. 여름 한낮의 햇살은 사람을 쓰러지게 만듭니다. 오른쪽은 방패를 들지 않는 손, 곧 무방비 상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취약한 자리에 서서 그늘이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조선 시대 한 가난한 농부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여름 논을 매다가 더위에 쓰러질 것 같을 때, 마침 큰 나무 그늘 아래 들어가 숨을 돌렸습니다. 그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이 종종 이런 모습입니다. 기적처럼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쓰러지지 않도록 정확한 자리에서 그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의 절정은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주목할 것은 '영혼을 지키신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도우심은 영혼의 보전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죄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도록, 마귀의 유혹에 영원히 패배하지 않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십니다.
어느 노년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평생 믿음으로 살았지만 만년에 치매가 찾아왔습니다. 가족의 얼굴도,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래된 찬송가 구절들은 잊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면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습니다. 기억이 흐릿해져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마지막 8절은 이 시 전체를 하나의 지붕으로 덮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출입'은 히브리 관용어로 삶의 모든 과정을 뜻합니다. 아침에 문을 나설 때부터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리고 '영원까지'라는 말은 이 지키심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원까지라면, 그것은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의 고백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구원의 선언입니다.
병원 복도의 그 사람은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들어 위를 향할 때, 그것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리에서 나오는 가장 담대한 고백입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세상은 이 고백을 나약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압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환난 속에서도 영혼이 붙들려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도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산을 향하여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그분을 향하여 눈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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