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편 142:5)
밤이 깊어질수록 동굴은 더 좁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윗은 돌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습니다. 사울의 군사들이 바깥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도망칠 곳도, 숨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른편을 둘러보아도 아는 자가 없고, 피난처도 없으며 자기 영혼을 돌볼 자도 없다고 그는 탄식했습니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정직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한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시 142:1)
경기도 어느 작은 도시에 70대 초반의 홀아비 집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 지 3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내가 쓰던 찻잔을 치우지 못했습니다. 무릎 관절이 나빠져 계단을 오르는 것이 고통이었고, 자녀들은 모두 멀리 살았습니다. 새벽 두세 시면 눈이 떠졌습니다.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다가 그는 자주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그것이 기도인지 아닌지 그도 몰랐습니다. 어떤 날은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예배 후 담임 목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요즘 기도 많이 하시죠?" 집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요즘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울기만 해요." 목사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습니다. "집사님, 그게 기도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시편 142편은 탄원시이지만, 형식을 갖춘 경건한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굴 안에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마스킬', 곧 '교훈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논리적 교훈보다 날것의 감정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 날것의 감정을 교훈으로 삼으십니다. 울음도 기도이고, 침묵도 기도이며,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라는 한 마디도 기도입니다.
한 병약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 앞에는 오래전부터 큰 바위가 있어 드나드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매일 그 바위를 밀어 보거라." 남자는 다음 날 새벽부터 순종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온몸을 바위에 붙이고 밀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여덟 달이 흘렀지만 바위는 단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어느 날 바위 앞에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주님, 저는 헛수고를 했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때 주님이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하지 않았다.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다. 이제 거울로 네 자신을 보렴." 남자는 눈을 들어 거울을 보았습니다. 거울 속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굳고 단단한 어깨, 탄탄한 팔뚝, 곧게 선 등허리,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요즘 밤에 잘 자고 있었습니다. 기침이 멎었습니다. 숨이 가쁘지 않았습니다.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남자는 더 이상 병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마다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은 여전히 창을 들고 다윗을 뒤쫓았습니다. 배신자들은 더욱 대담해졌고, 함정은 더 교묘해졌습니다. 동굴은 여전히 어둡고 좁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변했습니다.
시편 142편은 1절의 절규에서 시작하여 7절의 고백으로 끝납니다.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동굴 안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군사는 아직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에 의인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동체가 보입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찬양이 보입니다. 기도가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나치는 그의 원고를 빼앗고, 가족을 죽이고, 그의 이름 대신 번호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빼앗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프랭클은 훗날 기록했습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 단 하나,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마지막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다윗은 그 자유를 기도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동굴은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밀실이었습니다.
서울의 한 중년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집을 잃었고, 아이들과 단칸방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새벽 교회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상황이 바뀌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집을 돌려주세요. 남편이 다시 일어나게 해주세요." 6개월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교회 청소 봉사를 맡았습니다. 이웃집 어르신의 반찬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가진 것이 없을 때, 그녀는 가장 많이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러 갔는데, 제가 기도로 만들어졌어요."
다윗의 고백도 그것입니다. 옥에 갇힌 것 같던 영혼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방이 막힌 것 같던 사람이 소망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바꾸는 마법이 아닙니다. 기도는 땅을 사는 사람을 바꾸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의 응답을 '결과'로 이해합니다. 병이 나으면 응답, 취업이 되면 응답, 관계가 회복되면 응답, 그러나 시편 142편은 다른 것을 가르칩니다. 응답은 결과 이전에 이미 과정 속에 있습니다. 바위를 미는 여덟 달 동안, 남자는 이미 응답받고 있었습니다. 근육이 생겨났고, 폐가 강해졌고, 밤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굴에서 부르짖는 동안 그는 이미 응답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듣고 계셨고, 그 듣고 계심이 다윗을 붙들었고, 그 붙드심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면 그렇게 됩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변하게 됩니다. 바위를 옮기려 하지 말고, 그냥 오늘도 미십시오. 그것이 기도이고, 그 과정이 이미 응답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새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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