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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40편 - 아는 만큼, 믿는 만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9.

"주님이 고난받는 사람을 변호해 주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줄을 내가 압니다." (시편 140:12)

영화 〈암살〉에는 오래도록 마음에 걸리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이 마침내 밀정 염석진을 마주한 그 순간입니다. 해방이 된 후에도 반공친미보수의 외투를 걸치고 권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남자입니다. 반민특위마저 무력화시키며 살아남은 그 남자에게 안옥윤은 총구를 겨누며 묻습니다. "
왜 조국을 팔았나?" 염석진의 대답은 뜻밖에도 솔직합니다. "몰랐으니까.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깐. 알았으면 그랬겠나!"

배신은 무지에서 자랍니다. 그는 역사의 끝을 몰랐고, 그래서 현재를 팔았습니다. 반면 안옥윤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영화 초반, 누군가 그녀에게 묻습니다. 침략의 원흉 한두 명을 제거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녀의 답은 간결합니다. "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 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그녀를 싸우게 한 것은 결과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옳은 것에 대한 앎이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배신인지, 무엇이 인간다운 선택인지, 그 앎이 그녀를 총을 들게 했습니다.

시편 140편을 읽으면 안옥윤의 얼굴에서 다윗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사방이 적이었습니다. 시편 140편은 그가 얼마나 촘촘히 포위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독사 같은 혀를 가진 자들,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들, 발 아래 덫을 놓는 자들, 그물을 치는 자들, 그는 말 그대로 사방에서 조여드는 악의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안옥윤처럼, 그도 계속 싸웁니다. 무엇이 그를 버티게 했습니까?

다윗은 막연하게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주님이 고난받는 사람을 변호해 주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분임을."(시 140:12) 이것은 정보가 아니라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위에서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억울한 자의 편에 누가 서시는지, 그 앎이 그를 절망으로부터 지켰습니다.

우리 세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삽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면 알수록 더 불안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스를 볼수록, SNS를 들여다볼수록,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더 모르겠다는 느낌입니다. 정보는 넘치는데 방향은 잃은 느낌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데이터이지, 다윗이 가진 의미의 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앎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무작위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 붙들고 계신다는 것, 악인이 오늘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하나님이 뜨거운 숯불을 그 머리 위로 기울이신다는 것(시 140:10),역사에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의 끝에 정의가 있다는 것, 이 앎은 성경을 통해서만 옵니다. 뉴스 피드가 줄 수 없는 앎인 것입니다.

20세기 중반,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에서 글을 썼습니다. 감옥 안에서, 처형을 기다리면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우리가 선한 능력에 고요히 둘러싸여 있으니, 어떤 일이 오더라도 우리는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가 이것을 쓴 곳은 꽃밭이 아니었습니다. 나치의 감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감정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섭리가 악의 한가운데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이 앎이 믿음이 되는 순간입니다.

다윗도 감정적으로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시편 140편의 문장들은 절박합니다. "
주님, 악인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십시오." 이것은 여유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벼랑 끝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벼랑 끝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이 동시에 그 안에 있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의 부재가 아닙니다. 두려움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는 만큼 믿었고, 믿는 만큼 살았습니다.

염석진은 '
몰랐기 때문에' 배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반쯤은 진실입니다. 미래를 몰랐고, 역사의 끝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안옥윤과 본회퍼는 달랐습니다. 그들도 결과를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 앎이 그들을 끝까지 버티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앎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역사 위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앎, 그 앎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우리의 오늘이 됩니다. 아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삽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