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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37편 -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국심, 바벨론 강변의 애국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8.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편 137:5~6)

강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을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 강, 혹은 그 지류 중 하나입니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그 강변에 앉아 울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앉아서,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 있었습니다. 빼앗긴 땅, 불태워진 성전,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정복자들은 이상한 요구를 했습니다. "
시온의 노래를 한번 불러봐라." 전쟁에서 이긴 자들이 패배자들의 노래를 구경거리 삼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한 요청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무릎을 꿇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이겼다는 것을, 너희의 신도 너희의 노래도 이제는 우리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거문고를 강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닫았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하는도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3~4)

침묵은 때로 가장 강한 저항입니다. 악기를 다시 집어 들고 정복자들 앞에서 흥겨이 연주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굴복이었습니다. "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겠다." 그 결심 속에 이미 한 나라의 혼이 살아 있었습니다.

1944년 여름, 중국 대륙 어딘가에 다섯 명의 조선 청년이 있었습니다. 장준하, 김준엽, 윤경빈, 김영록, 홍석훈입니다. 그들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이들이었습니다. 낯선 중국 땅, 불로하 강변에서 그들은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강물로 몸을 씻었습니다. 일본군의 군복을 벗고 중국 군대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동쪽을 향해 조국이 있는 방향으로 섰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처음에는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곧 다섯 목소리가 합쳐졌습니다. 산 설고 물 선 중국 땅에 조선의 언어가, 조선의 노래가 뿌려졌습니다. 후렴구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목이 메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꺽꺽거리는 울음소리가 강물 소리와 섞였습니다.

장준하는 훗날 이 순간을 자신의 수기 『돌베개』에 기록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그 대목에 이른 사람들은 가슴 어딘가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그 감각을 압니다. 왜 우는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눈물이 나는 그 경험을 압니다. 바벨론 강변의 유대인들이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것처럼, 불로하 강변의 다섯 청년은 대한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시대는 달랐고 강의 이름도 달랐지만, 강변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의 결은 같았습니다.

시편 137편은 갑자기 강렬해집니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에게 서약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 137:5~6) 손이 재주를 잃고, 혀가 굳어버리기를, 음악과 말을 잃기를, 그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잊는다면, 그 손으로 무슨 음악을 연주하겠습니까? 그 혀로 무슨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닙니다. 정체성의 선언입니다. 나는 이 기억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조국이란 감각은 낯설 수 있습니다. 한 번도 빼앗겨본 적 없고, 강변에서 타국의 옷으로 갈아입으며 국가를 부른 적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이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이 땅, 이 언어, 이 이름입니다.

시편 137편은 복수의 감정도 담고 있어 불편하게 느껴지는 구절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조차 검열하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인간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빼앗기고, 조롱당하고,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나오는 날것의 감정, 그것까지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시편의 정직함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결국 말하는 것은 분노가 아닙니다. 기억입니다.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강변에 앉아 울면서도, 거문고를 나무에 걸어 두면서도, 그 슬픔 안에서 정체성을 붙들겠다는 것입니다.

조국이 무엇인지, 민족의 정기가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히압니다. 이 나라가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사무쳤던 그리움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불로하 강변에서 꺽꺽거리며 울던 다섯 청년처럼, 바벨론 강변에서 거문고를 나무에 걸고 입을 다물었던 유대인들처럼, 누군가는 이 땅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먹먹한 가슴으로, 그저 오늘이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