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편 134:1~3)
어떤 등산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험한 산길을 오르며 발목을 삐기도 하고, 폭우를 만나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정상에서 보이는 일출이 얼마나 장엄한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본 사람은 오르는 길의 고통을 다르게 견딥니다. 단지 참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며 걷는 것입니다. 신앙의 순례길도 그렇습니다.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걷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이사야는 노래했습니다. "그날이 오면, 유다 땅에서 이런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성은 견고하다. 주님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문들을 열어라. 믿음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여라"(사 26:1~2). 이것은 예언이자 약속입니다. 순례자들이 마침내 도달하게 될 영원한 도성의 광경입니다. 그 성문은 닫혀 있지 않습니다.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자들은 무기를 든 정복자가 아니라, 믿음을 지킨 순례자들입니다. 먼지 묻은 옷을 입고, 긴 길을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시편 134편은 바로 이 순례 시편집(시편 120~134편)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걷던 순례자들이 드디어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주의 모든 종들아, 주님을 송축하여라!"(1절) 긴 여정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134편에는 흥미로운 배경이 있습니다. "밤에 주님의 성전에 서 있는 주의 모든 종들아"(1절). 여기서 '밤에 서 있는 종들'은 성전에서 밤새 당직을 섰던 레위인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그들은 성소를 지키며 손을 들어 주님을 송축했습니다(2절). 이 장면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것이 '보여주기 위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수 받을 회중도 없고, 지켜보는 청중도 없는 밤의 성전에서, 그들은 여전히 찬양했습니다.
코리 텐 붐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성경 한 권을 숨겨 들어가, 밤마다 막사 안 여성들과 함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둠이 짙을수록 찬양은 더 빛났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의 성전에서 드린 찬양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예배였습니다.
이 시편이 순례 시편의 맨 마지막에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순례는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순례길 위에서 이미 그 찬양을 예습하며 걷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결말을 알고 시작합니다. 소설을 마지막 페이지부터 읽은 독자처럼,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이미 들었습니다. 성문은 열릴 것이고, 의로운 나라는 들어올 것이며, 주님께서 친히 성벽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길, 때로 발목이 삐고 폭우를 만나는 이 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첫 번째 질문부터 이것을 못 박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대답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지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그 즐거움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순례길 위에서도 그 즐거움이 이미 시작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칫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뭘 하느냐'와 '얼마나 잘하느냐'에 집중하다가, '왜 하느냐'와 '기뻐하느냐'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엄격한 규율과 금욕으로 신앙을 지탱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의무로 버티는 신앙은, 긴 순례길을 걷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은 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평화에 평화를 더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사 26:3). 평화에 평화를 더하는 것, 이것이 순례자의 걸음걸이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공포에서의 해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심판자로만 알던 사람이, 아버지로 알게 될 때, 신앙은 의무에서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순례길을 끝까지 걷게 하는 힘입니다.
밤의 성전에서 손을 들어 찬양하던 레위인들은 아무 보상도 없이,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신앙의 진수입니다. 결과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지금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례도 그렇습니다. 언젠가 성문이 열리고, 오래 걸어온 순례자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날, 우리가 할 일은 찬양입니다. 그날의 찬양이 진짜라면, 오늘 밤의 찬양도 진짜여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자리에서, 아직 길이 남아 있는 이 순간에, 손을 들어 주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을 아는 사람은 오늘을 다르게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순례길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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