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131:1~3)
어느 작은 마을에 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새벽마다 논에 나가 일했고, 저녁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언제나 같은 말로 끝났습니다. "하나님, 쌀 항아리를 채워 주십시오. 과일 상자를 채워 주십시오. 고기 광주리를 채워 주십시오."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안에는 한 번도 "감사합니다"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님은 마침내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쌀 항아리 앞에 서면 쌀이 솟아났습니다. 과일 상자 앞에 서면 과일이 가득 찼습니다. 고기 광주리 앞에 서면 고기가 넘쳤습니다. 처음 며칠은 황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쌀을 담다 보면 과일 상자가 눈에 걸렸습니다. 과일을 채우다 보면 고기 광주리가 빈 것 같았습니다. 고기를 쌓다 보면 쌀 항아리가 다시 작아 보였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세 곳을 숨 가쁘게 오가며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습니다. 등이 굽고 머리가 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가을날, 마침내 죽음이 그의 문 앞에 섰습니다.
그때서야 농부는 멈춰 섰습니다. 평생 채우러 다녔는데, 정작 자신은 단 하루도 그 풍요 앞에 앉아 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어찌 저를 거지처럼 살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그건 네 탓인 것 같구나. 꽉 차지 않아도 족한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편 131편은 짧습니다. 고작 세 절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시 안에 인간의 가장 깊은 병과 가장 오래된 처방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1절, 새번역) 다윗은 교만을 단순히 도덕적 결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교만을 크고 높은 일을 탐하는 마음, 곧 자신의 그릇보다 더 많은 것을 담으려는 욕망으로 이해합니다. 쌀 항아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일 상자를, 과일 상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기 광주리를 향해 뛰어가던 그 농부의 발걸음이 바로 다윗이 버렸다고 고백하는 교만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그 농부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다만 쌀 항아리 대신 연봉 계좌를 들여다보고, 과일 상자 대신 부동산 시세를 확인하고, 고기 광주리 대신 타인의 SNS 피드를 스크롤합니다. 더 갖고, 더 누리고, 더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회로는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문제는 그 회로에 끝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적응적 선호 형성'이라 부릅니다. 인간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그것을 기준선으로 삼고 다시 그 위를 원하게 됩니다. 목표는 늘 한 발 앞서 도망칩니다.
이 쳇바퀴를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은 '쾌락 적응'이라 불렀습니다. 복권 당첨자들을 오랜 시간 추적한 연구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당첨 후 1년이 지나면 그들의 행복감은 당첨 이전 수준으로 거의 정확히 돌아왔습니다. 더 큰 항아리는 더 큰 공허함을 만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2절에서 확고한 언어로 답합니다.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새번역) 여기서 '젖 뗀 아이'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젖을 먹는 아이는 배고파 웁니다. 무언가를 원합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다릅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머니가 좋아서 품에 안깁니다. 그 아이의 쉼은 조건이 없습니다. 항아리가 얼마나 찼는지와 무관합니다.
이것이 족함의 본질입니다. 족함은 가난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적다고 속이는 자기기만도 아닙니다. 족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히 채워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내면의 동의입니다. 노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족한 줄 아는 자는 부유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재앙이다." 수천 년을 건너온 이 말이 오늘도 낡지 않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평생 세 벌의 흰 옷과 안경 하나와 지팡이 하나만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물건은 사망 당시 기록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에는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반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45개의 궁전과 수천 벌의 옷과 수백 켤레의 구두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채운 것의 크기와 삶의 무게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족한 줄 아는 마음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백을 통해 옵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라는 다윗의 첫 문장은 선언이기 이전에 결단입니다. 나는 더 이상 쌀 항아리와 과일 상자와 고기 광주리 사이를 숨 가쁘게 뛰어다니지 않겠다는 결단, 지금 이 품 안에 머물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농부는 평생 채우러 다니다 빈손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품에 조용히 안긴 젖 뗀 아이는 아무것도 붙들지 않았지만 가장 충만했습니다.
욕심 항아리는 본래 바닥이 없습니다. 채우려 할수록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족한 줄 아는 사람은 항아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처음으로,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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