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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27편 - 목적이 이끄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0.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증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27:1~5)

어느 날 오후, 어떤 사람이 고속열차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열차는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도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을까요? 목적지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그는 어디를 향해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 질문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자크 엘릴은 일찍이 우리 문명의 가장 심각한 병리를 진단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
수단화'되는 현상입니다. 그의 책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엘릴은, 현대인이 목적을 잃어버린 채 수단만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섬뜩할 정도로 정확한 통찰입니다. 인류는 탈 것의 속도 신기록이 세워질 때마다 환호합니다. 그리고 더 빠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다시 달려듭니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낀 시간을,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쓸 것인가요?  의학은 날마다 경이로운 치료법을 발표하고, 사람들은 더 진보한 기술을 열망하며 수명 연장을 꿈꿉니다. 그런데 역시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늘린 수명을, 우리는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요?

더 빠르게, 더 오래, 더 많이, 그러나 어디를 향해, 왜? 엘릴은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정확한 비유로 묘사합니다. 수단에 의해 비인간화되고, 스스로도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현대인은 마치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앞에 앉아 있는 야만인과 같다고 말입니다. 기계는 있습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시간도 더 많아졌고, 수명도 훨씬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비유를 읽으며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몇 해 전 한 지인이 조기 은퇴에 성공했습니다. 수십 년을 오직 그날을 향해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퇴한 뒤, 그는 무너졌습니다. "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가 내게 한 말입니다. 아침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온종일 TV 앞에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목표는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잃었습니다. 달리는 것이 삶의 전부였기에, 멈추자 삶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것이 수단만 있고 목적 없는 삶의 결말입니다.

시편 127편은 이 오래된 문제에 대해 단호한 답을 건넵니다.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기자는 건축을 말하고 있지만, 실은 삶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집을 짓는 일, 성을 지키는 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고하며 먹고 사는 일, 자녀를 얻고 기르는 일, 이 모든 것이 여호와를 목적으로 삼지 않을 때에는 그저 수고에 불과하다고, 시편은 헛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고를 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다만 이것을 말합니다. 모든 수고는 올바른 목적 위에 놓일 때에만 의미를 얻습니다. 그 목적은 여호와이십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 127편의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편은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면서도, 그 수고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수고의 유무가 아니라, 수고의 방향입니다. 여호와를 목적으로 삼은 수고는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 없이 오직 성취와 생존만을 목적으로 삼은 수고는, 아무리 쌓아도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허물어집니다.

씨앗 하나를 땅에 심는 농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댑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 열매 맺게 하는 것은 그의 손이 아닙니다. 흙이고, 비이고, 햇빛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수고해도 그가 성장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다만 그 과정에 참여할 뿐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수고는 바로 이런 수고입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몫에 충실히 참여하는 수고, 그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루를 시작할 때 묻는 질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오늘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오늘 주님은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로 바뀌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관계 속에서, 내 성취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자꾸 잊습니다. 아침에는 기억했다가 점심쯤 되면 흐릿해지고, 저녁이 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바쁨이 우리를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수단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잊을 때마다, 이 말씀이 다시 우리를 붙잡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헛되다고, 주님만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고속 열차는 빠릅니다. 우리 시대도 빠릅니다. 그러나 빠르다는 것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지가 있을 때 속도는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그 이룸이 향하는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빠른 속도로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만이 우리의 목적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 위에 삶을 세울 때, 우리의 수고는 비로소 수고 이상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처소가 됩니다. 우리의 하루는 단순한 시간의 소비가 아니라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됩니다. 주님이 목적이십니다. 살면서 자꾸 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오늘, 다시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