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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30편 - 간절하게, 더 간절하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4.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 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 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꼐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편 130:1~8)

깊은 곳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지하 감옥의 어둠도 아니고, 폭풍우 치는 바다의 깊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한 발짝도 올라설 수 없는 그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입니다. 시편 130편의 시편 기자는 바로 거기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944년 겨울, 헝가리 출신의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은 나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또 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영하의 추위 속에 해진 신발을 신고 돌밭을 걷는 그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
나는 비참한 상황 한가운데서도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 믿음이 나를 살게 했다." 살아남을 근거가 전혀 없는 자리에서,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를 지탱한 것은 체력도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향한 간절한 희망, 그것이었습니다.

시편 130편의 시편 기자도 그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의 무게로 짓눌려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의 무너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허물 앞에 완전히 고꾸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아직 응답이 오지 않았어도, 아직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어도, 그는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부르짖음은 절망의 언어가 아닙니다. 부르짖음은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자의 언어입니다.

시편 기자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합니다. "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이것은 신학적 명제이기 이전에, 삶의 바닥에서 길어 올린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스스로 증명하려 합니다. 선행을 쌓고, 의로운 행실을 더하고, 기도의 분량을 늘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때가 있습니다. 기준이 높아질수록 실패는 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농부 파홈은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립니다.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그 땅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욕심껏 달리다 결국 출발점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고작 무덤 한 평이었습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파홈처럼, 우리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할 때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멈추지 않고 선언합니다. "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용서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용서 앞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움이 아닌 경외로 바라보게 됩니다. 벌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크신 은혜에 압도되어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위의 파수꾼을 상상해보십시오. 한밤중입니다. 사방은 어둡고 적의 기척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도 같습니다. 그는 졸아서도 안 되고 자리를 떠나서도 안 됩니다. 차갑고 긴 밤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는 그 순간을 향해, 그는 초침 하나하나를 온 신경을 곤두세워 기다립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
나의 영혼이 주를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파수꾼보다 더합니다. 파수꾼의 기다림도 이미 절박하고 간절한데, 시편 기자의 기다림은 그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은 어디서 옵니까? 아침이 반드시 온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의심하며 기다리지 않듯,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확신이 간절함을 낳고, 간절함이 인내를 가능하게 합니다.

영화 〈서든 데스〉에는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스하키 경기장에 테러가 발생합니다. 폭발이 일어나고,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혼란의 한가운데서 한 아이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빠가 떠나기 전 말했기 때문입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 있어라." 전광판이 무너지고, 연기가 자욱하고, 아는 얼굴은 아무도 없는 그 자리에서, 아이는 앉아 기다립니다.

마침내 피투성이가 된 아빠가 뛰어옵니다. 아이는 달려가 아빠를 안으며 말합니다. "
난 아빠가 올 줄 믿었어요. 그래서 겁났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어요." 이 아이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괜찮아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아빠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사랑을 믿을 때 희망이 생기고, 희망이 있을 때 인내가 가능해집니다. 겁이 나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시편 기자는 마지막에 개인의 고백에서 공동체의 초대로 나아갑니다.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한 마디는 혼자만의 위로로 끝내기 아까운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경험한 그 구원, 내가 용서받은 그 은혜, 내가 파수꾼보다 간절하게 기다린 끝에 맞이한 그 아침은, 혼자 가슴에 묻어둘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붙들어야 할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습니다. 더디게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그 나라는 한 걸음씩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례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십니다. 그분의 구속하심은 풍성합니다. 모든 죄악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멈출 수 없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아빠를 믿고 자리를 지킨 그 아이처럼, 우리는 오늘도 그 나라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두렵더라도, 더디더라도,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그 확신으로, 오늘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