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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38편 - 멀리서도 알아보신다, 아는 만큼, 믿는 만큼 살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8.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시편 138:6)

SNS 피드를 열면 매일같이 누군가의 '
선언'이 쏟아집니다. 연예인은 환경을 걱정하고, 기업 CEO는 상생을 외치고, 정치인은 통합을 약속합니다. 그 말들은 세련되고 진지하며, 때로는 눈물까지 곁들여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는 ''과 '실제' 사이의 거리가 지구와 달만큼이나 멀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스라엘의 풍자작가 에프라임 키숀은 이 간극을 오래전에 꿰뚫어봤습니다. 그의 정치우화소설 『닭장 속의 여우』는 한 정치인이 '
요양'을 명목으로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마을은 원래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이름을 알고, 저녁이면 마당에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치인이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입만 열면 '
하나됨'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웃 사이를 오가며 은근히 불씨를 지폈습니다. "저 사람이 사실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더라고요."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마을은 편이 갈리고, 담장이 높아졌습니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정치인의 존재감은 더 커졌습니다. 그는 분열을 먹고 자라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키숀이 이 소설을 쓴 건 수십 년 전입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자꾸만 오늘의 뉴스 화면이 겹쳐 보입니다. 한국 사회도, 어쩌면 교회도, 생각해보면 '
높은 데'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충동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그것의 원형입니다. 사람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했습니다. 단순한 건축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는 욕망, 즉 '보여지고 싶다'는 충동이 그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바벨탑 세대와 SNS 세대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팔로워 숫자, 조회 수, 좋아요 개수, 우리는 매일 조금씩 '나만의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탑이 높아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흔히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
올라가고 나서야 알았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유명 유튜버가 구독자 100만을 달성한 날 밤, 혼자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는 고백, 대기업 임원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공허함을 느꼈다는 이야기, 높이 올라가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곳엔 따뜻함이 없었습니다.

시편 138편의 시인 다윗은 이 대목에서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시 138:6) 이 짧은 한 절 안에 두 개의 상반된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선은 아래를 향합니다. 낮은 자에게로 말입니다. 반면 교만한 자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멀리서도' 다 들여다보인다고 합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숨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보아흐로, 단순히 '거만한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부풀려 남보다 높이 세우려는 구조적 성향을 가리킵니다. 키숀의 정치인처럼, 자신의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남을 작게 만드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속으로는 '높은 데로만'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멀리서도 그것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
안다'는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깊은 관계적 앎, 내면까지 꿰뚫는 앎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그 사람의 SNS 피드만 보시는 게 아니라, 피드를 올리기 전의 마음 상태까지 보신다는 것입니다.

대조가 선명해지는 지점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분은 철저히 '
낮은 데'를 선택하셨습니다. 마구간 태생, 목수의 아들, 세리와 창녀의 친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분, 빌립보서 2장은 이것을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이라 부릅니다. 그분은 높이 계셨으나 낮아지셨고, 그 낮아지심으로 인해 오히려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늘 그 역설 위에 서 있습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금메달을 딴 윤성빈 선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기 전날 밤, 그는 트랙 위를 한 바퀴 천천히 걸었습니다. 화려한 세리머니를 준비하거나 인터뷰 멘트를 다듬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낮게, 트랙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트랙 레코드를 경신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
어떻게 그런 집중력이 나왔나요?"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제 트랙이 저한테 말을 걸어왔어요. 낮아지면 보이는 게 있더라고요."

낮아지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슬로건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수천 년 전에 이미 발견한 삶의 원리입니다. SNS 피드에 오늘도 누군가의 선언이 올라올 것입니다. 그 말이 진심인지 퍼포먼스인지, 우리는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서도 아십니다. 고화질 카메라보다 선명하게, 알고리즘보다 정확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이 머무는 곳은 '
높은 곳'이 아닙니다. 시편 138편의 시편 기자가 증언하듯, 그분의 시선은 낮은 자에게 향해 있습니다. 부러지기 직전의 갈대 같은 사람, 이름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 무너지고도 다시 기도하는 사람,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눈길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
주님, 저를 낮은 데로 이끌어 주십시오. 높이 오르려는 욕망이 아니라, 낮아지셨던 그분을 닮는 것이 제 삶의 방향이 되게 하소서." 멀리서도 알아보시는 그분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더 솔직한 낮아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