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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십자가(3) -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 십자가 앞에 선 인간의 민낯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라디아서 6:11~16)

어느 해 겨울, 한 신학자가 유럽의 오래된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스테인드글라스, 수백 년 묵은 파이프 오르간, 황금으로 장식된 제단, 그는 한참을 서서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이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취당했을까." 아름다움 뒤에 숨은 권력의 냄새, 그것은 결코 복음의 향기가 아니었습니다.

존 칼빈은 종교개혁의 한복판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오늘날 양식 있는 사람 백 명을 면담해 보면, 그 가운데서 로마 가톨릭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려는 사람 한 명을 찾기가 힘듭니다." 이 말은 단순한 종파 비판이 아닙니다. 칼빈이 직면한 것은 훨씬 더 뿌리 깊은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특히 그 잘못이 자신의 종교와 관련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저항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단순한 신학 논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내려온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이 사건은 초대 교회 최초의 대논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베드로가 일어나 못을 박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교회 밖의 이교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려 했습니다. 은혜 위에 행위를, 십자가 위에 율법을 얹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교묘한 왜곡입니다.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더해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순수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직 은혜만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이 찾아왔습니다. 박해하던 로마가 오히려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교회는 갑자기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웅장한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화려한 예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이교의 절기가 기독교의 이름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
오직 은혜"라는 말이 조용히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한 중세 수도원장이 남긴 말이 그 심리를 잘 드러냅니다. "
은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버리면, 사람들이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람들의 헌신과 열심을 이끌어내야 했습니다. 더 많은 순례자, 더 많은 헌금, 더 많은 복종, 그래서 은혜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졌습니다. 공로가 쌓여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가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세 천 년의 어둠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묻혀 있던 진리를 다시 꺼냈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성경으로만."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자를 불태운 것이, 다름 아닌 교회였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재현되는 중세 문제는 그것이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말합니다. "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이런 말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죽은 후에 더 큰 상을 받으려면 헌신과 봉사와 충성의 행함이 보태져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 그러나 복은 행위, 이 논리 구조는 중세 가톨릭의 문법과 정확히 같습니다. 단어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면죄부" 대신 "헌금"이, "성지순례" 대신 "새벽기도 출석"이, "고해성사" 대신 "봉사 실적"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어떤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교회의 모든 일을 도맡았습니다. 새벽기도, 헌금, 봉사, 전도,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 모든 일을 했는지 자문하다가 멈춰버렸습니다. "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했는가?" 그 물음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면, 자신의 수십 년은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을 처음 읽으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성경 66권이 전부 십자가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은가? 지혜도 있고, 도덕도 있고, 삶의 원리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바울은 단호하게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새 번역은 이 구절을 더 선명하게 옮깁니다. "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세상이 제공하는 가치 체계인 성공, 인정, 축적, 경쟁에 대하여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은 충격적인 장면을 전합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앞에 두고 그 둘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로마의 정치꾼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공동의 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의 적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의 집단적 의지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데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은 그 장면을 해석하면서 그 모든 것이 "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예정하신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과 마주합니다. 그 자리에 동의하고 합동한 자들 가운데, 오늘의 우리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빛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오지에서 수년간 사역하다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운 것도, 이룬 것도, 눈에 보이는 열매도 없었습니다. 그는 텅 빈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
주님, 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평안합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모든 자랑이 내려놓아졌을 때, 비로소 아무것도 빼앗길 것이 없어집니다. 세상이 죽어 보이는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는 종교적 조건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조건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창조된 존재,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패배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해방의 선언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가장 크신 분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분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