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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덤으로 얹혀 팔리는 참새, 갚을 것이 없는 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4.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4:7~14)

어느 해 늦가을, 한 노목사가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채 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형 교회를 수십 년간 이끌어 온 그였지만, 정작 그가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건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한창이던 나이에 스스로 담임 목사 자리를 내려놓은 것은, 매주 돌아오는 설교의 무게가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쓴 글에 따르면, 아버지는 설교를 '
십자가'라 불렀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온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단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그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조기 은퇴라는 결단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그 글을 읽으며 한없이 부끄러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요즘 설교를 힘들어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목사 노릇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 다. 그런데 그 힘듦의 이유가 그 노목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 노목사는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무게 때문에 힘드셨습니다. 그런데 젊은 목사는 다릅니다. 설교를 거듭할수록,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
과연 내가 이것을 해도 되는 사람인가'라는 자괴감이 깊어지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젊은 목사는 복음의 깊이를 들여다볼수록 그렇게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
사랑하라, 섬겨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몸을 숨기기 일쑤였습니다. 성경을 더 알수록 삶이 성숙해지기는커녕, 자신의 욕망과 죄성을 교묘하게 감추는 실력만 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를 남들에게 외치는 것이 위선 아니냐."

성철 스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남선녀를 속였다." 평생 구도의 길을 걸어온 고승이 임종 앞에서 남긴 말치고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이런 고통을 아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 사람들은 그를 이미 도달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시선의 무게가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아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 인생의 주인은 '
'입니다. 그 ''라는 우상을 지키기 위해 삶까지 이용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들키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겸손해 보이려는 몸짓조차, 자기비하로 포장된 자기 자랑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들킬 때, 정말이지 자신이 너무 가증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리새인의 집 잔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손님들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저마다 주인과 가장 가까운 상좌를 차지하려 눈치를 보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향해 슬금슬금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식 잔치 자리의 풍경이었습니다. U자형 식탁에서 주인의 자리와 가까울수록 상좌였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을 가름했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율법사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금식하고, 십일조 드리고,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몸에 두르고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상좌 다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
택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작입니다. 그들은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하며 끊임없이 더 좋은 자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시고'로 번역된 단어는 현재분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광경을 지금 이 순간에도 면밀히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 시선이 섬뜩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 준수가 결국 이 자리에서 폭로됩니다. 그 모든 종교적 열심이, 사실은 상좌에 앉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처럼 보였던 그 행위들이, 실은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한 자아 숭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찰스 피니는 한때 부흥 집회의 대명사였습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를 들으며 회심했고, 그의 이름은 미국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내가 설교한 곳을 다시 방문해 보면, 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중들이 이전보다 더 나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토록 뜨겁게 불을 질렀던 부흥의 현장들이 시간이 지나면 더 냉랭해져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화려한 성과 뒤에 남겨진 폐허, 어쩌면 그것은 그 설교들이 하나님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종교 행위는 가장 고상한 외양을 가진 자아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금식도, 기도도, 십일조도, 심지어 선교도 '
'를 위한 상좌 챙기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집요한 죄성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그렇다면 낮아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낮아지기 위해 더 열심히 선행을 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겸손한 척 애를 써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조차 '
높아지기의 위장 전술'이라 하십니다. 그 모든 노력의 한가운데서도 주인공은 여전히 ''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서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토색하지 않고 불의하지 않으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끝에 은연중에 걸려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이만하면 잘하고 있지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동족의 세금을 착취해 로마에 바치던,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멀찍이 서서 눈도 들지 못합니다.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특별한 종교 행위가 없습니다. 대단한 고백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저는 하늘도 쳐다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십니다.

낮아짐은 성취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도덕적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자신의 참된 실체를 가감 없이 직면하게 만드시는 것, 그리하여 "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계속됩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갚을 능력이 있는 벗이나 부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 소경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갚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잔치는 세상의 잔치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은 오직 하나,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처음 초대받은 자들, 즉 바리새인들은 오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다 하고, 다른 사람은 소를 샀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장가를 들었다 합니다. 이유는 다 다르지만 결론은 같습니다. 자기 볼일이 있어서 남의 잔치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 준수와 종교 행위가 사실은 자기 일상 챙기기의 일환이었음이 이 순간 드러납니다. '
'의 볼일이 하나님의 잔치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종을 거리와 골목으로 보냅니다. 가난한 자, 병신, 소경, 저는 자를 데려오라고, 그것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합니다.

강권,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자기는 그 잔치와 아무 상관 없는 줄 알고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와 손을 붙들고 잔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격을 갖추어 간 것도 아닙니다. 그냥 끌려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국 잔치는 우리가 갚을 것을 마련하여 가는 곳이 아닙니다. 강권하여 초청받아 가는 곳입니다. 그 잔치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주인이 주신 예복 하나입니다. 자기 옷을 입고 들어온 사람은 쫓겨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예복을 '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의의 세마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자존심 상해서, 끊임없이 ''의 존재성을 확립하려 합니다. 무언가를 더 드리고, 더 행하고, 더 쌓으려 합니다. 마치 가인처럼, 열심히 제사를 드리지만 그 제사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시선이 참새 한 마리에 닿습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 하는도다."(눅 12:6) 앗사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면 한 마리는 그냥 덤으로 얹어주는 것입니다. 옛날 포장마차 안주 접시 위에 올라가는 그 참새가, 하나님이 지키시는 참새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한 달란트짜리 새가 아닙니다. 덤으로 얹혀 팔리는 새입니다. 그렇게 헐값에 팔려 포장마차 안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참새는 그 처사에 순종합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가벗고 안주 접시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반면 인간은 어떻습니까? 그 참새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하나님의 처사가 불만스럽다고 주정을 부립니다. 맹수도 먹이가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참새도 어디로 팔리든 원망하지 않습니다. 유독 인간만이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모면하겠다고 나섭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포장마차 안주 접시 위의 참새가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신앙인 주기철 목사는 다섯 차례 투옥되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결국 1944년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 제목은 '
일사각오', 한 번 죽기를 각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는 자로, 강권하여 초청받은 자로, 포장마차 참새처럼 하나님의 처사에 순종하며 그 삶을 마쳤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는 상좌에 앉힐 자였습니다.

낮아짐은 비참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시키고 업그레이드하여 자랑스러운 일꾼으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가난한 자로, 저는 자로, 소경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시고,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아 죽여 가십니다. 그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 과정이 당혹스럽고 아프고 외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 낮아짐의 자리가 바로 가나안 여인이 섰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
주님, 저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에게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자신이 그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아는 사람은 그저 긍휼만 구합니다. 그것이 진짜 낮아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낮아진 자가 어린양의 혼인잔치 상좌에 앉게 될 자입니다.

아무 공로 없이, 아무것도 갚을 것 없이, 그저 강권하여 초청받아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처사에 묵묵히 순응하며, 오늘도 그냥 살아 있으면 됩니다. 외롭고 힘들어도, 그냥 살아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