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 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3:28~37)
1943년 겨울, 네덜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코리 텐 붐의 가족은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코리는 매일 아침 점호를 받으며 굶주림과 구타와 죽음의 공포 앞에 섰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지킬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학벌도,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심지어 건강한 몸도 철조망 밖에 두고 왔습니다. 내어 놓을 떡이 단 한 조각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코리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수용소에서 나는 처음으로 완전히 자유로웠습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만 남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역설이 오늘 우리가 마가복음 13장에서 듣는 주님의 음성과 닿아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
우리나라 전래 동화 「해님 달님」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떡장수 어머니가 장을 마치고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 호랑이를 만납니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며 위협과 회유를 반복합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떡을 하나씩 내어 줍니다. 그러나 떡이 떨어지자 호랑이는 결국 어머니마저 삼켜 버립니다.
이 동화를 복음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섬뜩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문제는 어머니가 떡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떡을 아무리 많이 가져갔어도 호랑이는 결국 어머니를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호랑이의 제안은 처음부터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말은 약속이 아니라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 어머니와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옥이 두렵고, 하나님이 무섭고, 저주가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나의 떡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착하게 살면, 남들보다 더 많이 희생하면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리라는 기대 속에서 오늘도 떡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떡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아니 그 떡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이 착각의 뿌리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떡 하나 주면' 제안입니다. 너의 행위로 너의 운명을 개척하라는 부추김이었습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하고, 스스로 높아지고, 스스로 신이 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안은 오늘날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반복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 더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더 많이 헌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 모든 제안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생존과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고후 4:4).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자기를 완전히 비워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시는 삶을 사셨습니다(빌 2:7).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참된 의미입니다.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비워지는 존재,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 드리는 존재,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본래 자리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떡을 만들어 내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떡을 받아먹도록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는' 계약으로 읽었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호랑이의 제안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 했고,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달래려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너희는 떡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거울이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지키려 해도 율법 앞에서 인간은 무너집니다. 그 무너짐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아들을 보라. 그가 너희 대신 이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하나님만이 통과하실 수 있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시험지를 대신 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 되셔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셨고, 그 합격자의 신분을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것이 생명나무 실과입니다. 성도는 선악과 시험을 스스로 통과한 자가 아닙니다. 합격자가 자신의 합격증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떡을 내어 놓아서 산 것이 아니라, 떡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결혼 장면은 이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를 여시고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습니다. 심장을 감싸고 있던 그 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눈을 떴을 때 그 앞에 여자가 서 있었습니다. 아담은 말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그 여자에게 이름을 주었습니다. '여자'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남편의 잠듦, 곧 죽음을 근거로 하여 한 몸인 여자가 탄생한 것, 그것이 혼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형입니다. 신랑 예수님과 신부 교회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미리 그려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신부를 맞이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그때 신랑은 십자가 위에서 잠에 드셨습니다. 그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습니다.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죽음을 대가로 죽었던 신부가 살아납니다.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사랑의 고백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산 자'라는 이름입니다.
신부는 자격을 갖추어 신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신랑의 죽음으로 신부가 된 것입니다. 빙폐, 곧 신랑이 신부에게 지불하는 예물은 아내의 몸값이기 이전에 신랑의 사랑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향한 신랑의 빙폐입니다. "당신의 가치는 내 목숨과 같습니다"라는 고백이 십자가 위에서 피로 새겨진 것입니다.
에스겔 16장에 이 혼인의 실체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광야에 버려진 갓난아이가 있습니다. 아무도 씻겨 주지 않았고, 아무도 강보에 싸 주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인 채로 들판에 버려져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아이를 보십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지나가시며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자격을 갖추기 전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랍니다. 하나님이 다시 지나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옷으로 덮는 것, 그것이 혼인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남자의 겉옷이 여자를 덮는 것은 혼인의 선언이었습니다. 룻기에서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라고 말한 것이 바로 청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피투성이의 신부를 씻기시고, 기름을 바르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패물을 채우십니다. 그 신부가 하늘의 왕후가 됩니다. 신부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신랑이 아름답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는 말씀은 신부의 공로가 아니라 신랑의 열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옷은 신랑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옷입니다. 아가서의 말씀처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사랑을 완성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주인이 집을 떠납니다. 종들에게 각자의 사무를 맡기고 명령합니다. "깨어 있으라." 그런데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물 때일지, 밤중일지, 닭 울 때일지, 새벽일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사실상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야 합니다. 육신을 가진 이상 항상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12장은 그 주인이 어디서 돌아오는지를 알려줍니다. 혼인잔치입니다. 이미 완료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요한계시록에서 미래의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인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미 다 치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예정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이미 완료된 사건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그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에덴의 아담 안에 내가 들어 있고 요한계시록의 혼인잔치 안에도 내가 들어 있습니다. 역사는 우발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완료된 언약이 가시적으로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하실 때,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잠을 이겨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완료된 혼인잔치의 실체를 믿음으로 아는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슬기로운 다섯 처녀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어 있는 자로 혼인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깨어 있음은 눈꺼풀의 문제가 아닙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위해 비싼 기름을 미리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기름으로 자신의 일상을 윤택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기름을 팔아 옷을 살 수도 있었고, 음식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도 나름의 합리적 판단을 했습니다. '신랑이 오면 그때 준비하면 된다. 지금은 내 일상을 챙기는 것이 더 현명하다.'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소유의 떡을 만들어라, 성공의 떡을 만들어라, 선행의 떡을 쌓아라, 착함의 떡을 준비하라. 그 떡들이 당신을 살리고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떡을 만들어 내느라 혼인잔치의 초청을 경홀히 여깁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큰 잔치 비유의 사람들처럼, 소도 사야 하고, 밭도 봐야 하고, 장가도 가야 합니다. 이성적입니다. 경제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호랑이 앞에 내어 놓을 떡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신랑의 혼인잔치가 이미 완료된 잔치임을 알았습니다. 신랑 외에 다른 것이 자신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비효율적으로 보였지만, 그것이 유일한 지혜였습니다.
코리 텐 붐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전 세계를 다니며 용서와 은혜를 전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냈습니까?" 코리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깨어 있음의 자리입니다. 내어 놓을 떡이 없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선함도, 열심도, 헌신도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알게 된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랑의 빙폐, 곧 십자가의 무게가 실감 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서 내어 놓을 떡을 없애 버리십니다. 건강이 사라지고, 관계가 무너지고, 자존심이 꺾이고, 스스로 쌓아온 것들이 허물어집니다. 그것은 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마귀의 '떡 하나 주면'이라는 속삭임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내어 놓을 떡이 없어야 비로소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떡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떡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떡을 주시는 분입니다.
마가복음 13장 3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 주어진 엘리트 과제가 아닙니다. 이미 혼인잔치가 완료된 그 나라로부터 오시는 신랑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깨어 있는 자는 이것을 압니다. 자신이 피투성이의 신부였다는 것을, 그럼에도 신랑이 자신의 옷으로 덮어 하늘의 왕후로 세워 주셨다는 것을, 그 혼인잔치에 자신의 공로는 한 톨도 없다는 것을, 오직 신랑의 피로 된 것임을 말입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일상을 목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소도 사야 하고 밭도 봐야 하는 세상의 떡이 삶의 중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매불망 혼인잔치에서 돌아오시는 신랑을 향해 있습니다. 그 기다림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것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으로 챙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세상과 함께 잠들어 있으면서도 깨어 있는 자로 불렸던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떡이 아니라, 신랑이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수용소의 코리 텐 붐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내어 놓을 떡이 없는 그 자리에서, 하늘의 떡이 임했습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자의 역설입니다.
호랑이는 오늘도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이미 신랑의 피로 호랑이의 아가리가 찢겨 버린 것을 아는 자는 더 이상 떡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다만 기다립니다. 혼인잔치를 완료하고 오시는 신랑을 말입니다. 그 기다림이 이 세상에서 성도가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마가복음 13: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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