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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십자가(4) -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3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0~11)

어느 작은 마을에 오래된 법정이 있었습니다. 그 법정의 판사는 평생 법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법정에 한 청년이 섰습니다. 죄목은 명백했고, 증거는 완벽했습니다. 법대로라면 징역 1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판사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다 잠시 멈추었습니다. 피고석에 앉은 청년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법정 안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아들을 감옥에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아들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이 두 마음은 절대로 함께 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판사는 판결문을 읽었습니다. "
피고에게 법이 정한 형량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법복을 벗었습니다. 판사석에서 내려와 피고석 앞으로 걸어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판사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이 아이의 벌금과 형량을 대신 치르겠습니다." 그 순간, 법정 안의 모든 것이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법도 살고, 아들도 살았습니다.

시편 85편 10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이 짧은 한 구절이 품고 있는 긴장은 사실 인류 역사 전체의 긴장입니다. 인애, 곧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냉정합니다. 죄인은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진리대로 하면 불쌍하다고 봐줄 수 없습니다. 인애와 진리, 이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 두 열차처럼 보입니다.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의와 화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대로 하면 죄인과의 화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둘이 만났다고 노래합니다.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어디서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판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법이 요구하는 의는 완전히 충족되었고, 아버지의 긍휼도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했고,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살리기를 원했습니다. 그 두 요구를 동시에 완전히 충족시킨 자리, 그것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이 십자가를 향한 길을 한 편의 장엄한 하강과 상승으로 그립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주의 왕이 인간의 옷을 입었습니다. 모든 권세의 주인이 종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강의 가장 낮은 자리, 바닥 중의 바닥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단순한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노예와 가장 흉악한 범죄자에게만 적용되는 처형 방식이었고, 유대인들의 눈에는 신명기의 말씀대로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저주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내려가셨습니까? 우리가 있는 그 자리까지 내려오셔야 우리를 끌어올리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수부가 익사자를 구하려면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구하시려면 그 저주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이 말씀을 가지고 곧장 이렇게 달려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설교의 전부가 되는 순간, 복음은 또 하나의 윤리 강연이 되어버립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되고, 신앙은 다시 도덕적 노력으로 축소됩니다.

바울이 "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할 때, 그것은 십자가를 따라 사는 행위 지침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성한 화목, 그 놀라운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품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제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 가지 응답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입니다. 세상에서 무릎을 꿇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강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소원을 얻기 위해 꿇기도 하고, 사랑하는 연인 앞에 프러포즈하며 꿇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군인이 항복하며 꿇기도 합니다. 그러나 옛 무사도의 전통에서, 패장은 무릎을 꿇는 대신 자결을 택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은 사람의 이름 앞에 누가 스스로 무릎을 꿇겠습니까? 더구나 "
내가 당신을 죽인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당신이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선언하는 무릎 꿇음이 어떻게 인간 스스로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기적입니다.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대단한 신앙인이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 기적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게 하시는 분도, 그 무릎 꿇음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도,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모두 같은 무릎 꿇음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18~19절은 눈물로 씌어진 경고입니다. "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이들이 교회 밖의 불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무릎을 꿇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무릎 꿇음의 목적이 다릅니다.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고, 땅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무릎을 많이 꿇는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하여 무릎을 꿇었는지가 문제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 내 죄를 고백하며 꿇었습니까, 아니면 내 욕망을 이루어 달라며 예수의 이름을 빌린 것입니까? 빌립보서 3장 20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은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긴 그녀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시민권을 붙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세상에서 아무리 깊은 어둠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깊습니다." 땅이 전부라면 수용소는 지옥이 맞습니다. 그러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에게, 이 땅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의 길입니다.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고향 가는 나그네가 집을 그리듯, 그 오심을 사모합니다. 그 기다림이 바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지금도 서 있습니다. 저주받아 죽으신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세상의 눈에 여전히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미련한 무릎 꿇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이며, 인애와 진리가 입을 맞추는 자리이며, 우리가 하늘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무릎 꿇음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이 꿇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기적입니다. 그 기적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