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3:28~37)
늦은 밤이었습니다. 한 노인이 창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집 안은 고요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은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정확히 몇 시에 도착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비행기가 연착될 수도 있었고 입국 절차가 길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냥 주무세요. 오면 전화하겠죠." 하지만 노인은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시계를 보며 의무적으로 하는 일도 아닙니다. 마음이 이미 그 사람에게 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긴장된 종교생활을 떠올립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거룩하게 살고, 더 많은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음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어 있음이란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삶의 행복과 안전과 만족을 세상에서 찾고 있는가, 아니면 오직 주님에게서 찾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었지만 늘 불안했습니다. 직장에서 인정받아야 행복할 것 같았고, 돈을 더 벌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바빴습니다. 승진을 위해 노력했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계산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구조조정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붙잡고 있던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능력과 성취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이런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사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심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온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무릎을 꿇고 사람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네가 열심히 씻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평생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애씁니다. 더 착해지려고 하고, 더 의로워지려고 하고, 더 훌륭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힘으로 깨끗해질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실패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목욕을 시켜 주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부모가 씻겨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목욕을 마친 뒤 갑자기 부모에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깨끗하게 만들었어요."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 놓고 나중에는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점점 반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수록 자신의 연약함도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겨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로를 위해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은혜를 증언하라는 뜻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발을 씻기는 삶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을 높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약한 자가 은혜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것 같았습니다.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돼지우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배고픔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아버지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달려 나와 그를 안아 주었습니다. 조건도 없었습니다. 심사도 없었습니다. 책망도 없었습니다. 그냥 품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탕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결국 이 자리로 인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하게도 하시고, 넘어지게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게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망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붙들고 있는 손을 놓게 하시고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성숙은 세상이 말하는 성장과 다릅니다. 세상은 "나는 할 수 있다"로 성장하지만, 성도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로 성장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크게 만드는 길을 가지만, 성도는 자신을 작게 만드는 길을 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의 자리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씻기신 주님을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도 말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신 주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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