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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십자가(5) - 십자가는 기초가 아니라 전부입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로새서 1:20~23)

어떤 운동이든 오랫동안 훈련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같은 말을 합니다. "
기본으로 돌아가라." 처음에는 그 말이 답답하게 들립니다. 이미 기초는 다 알고 있는데, 왜 자꾸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말입니다. 축구 선수가 수십 년을 뛰어도 코치는 여전히 패스와 트래핑을 반복시킵니다. 피아니스트가 국제 무대에 서기 직전에도 하농 손가락 연습을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이 기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곧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기초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평을 이루었다는 말은, 그 이전에 전쟁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21절은 그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원수, 그것도 마음으로 원수가 된 상태였습니다.

잠언 4장 23절은 마음을 가리켜 "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 인간의 본래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웃고 살아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흑암의 권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원수들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피였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
그 이야기는 이미 다 아는 것 아닌가요? 십자가, 구원, 화목, 교회 다닌 지 몇 년인데..." 그 마음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이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우리 사회는 빠름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빠른 배송, 빠른 결과, 빠른 성장, 이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왔습니다. 몇 년 안에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성장했다는 부흥 스토리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1년에서 2~3년 만에 "주의 군사"를 만들어낸다는 프로그램에 줄을 섭니다. 복음은 빠르게 통과해야 하는 입문 과정이 되어버리고, 이제는 뭔가 더 수준 높고 실질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2장 8절이 경고합니다.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마케팅 원리, 심리학, 경영학, 이것들이 나쁜 학문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복음의 자리를 차지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를 붙들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머리 없이 움직이는 괴물이 됩니다.

골로새서 2장 14~15절은 십자가가 무엇을 했는지를 분명히 말합니다. "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여기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는 율법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빚진 자로 서 있다는 고발장,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셨습니다. 마치 법원에 출석해서 판결문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이, 누군가가 그 판결문 자체를 찢어버리는 것을 목격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완전히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한 번 지나가고 마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앞에 서야 하는 영원한 현실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의 탄식이 여기서 울립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자화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6장 1~6절은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까지 맛본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타락의 정의가 충격적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타락은 방탕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도 있고, 능력도 행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도 맡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함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 십자가 없이도 내 능력으로, 내 프로그램으로, 내 열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타락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은혜로 신앙을 시작했는데, 몇 년이 지나자 자신의 헌신과 봉사와 경력이 쌓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
나는 이 정도는 했으니까"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처음에 한 번 통과한 관문이 되어버리고, 이제는 자기 자신의 의가 구원의 근거가 되어갑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바라보자"는 말은 한 번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선을 고정한다는 뜻입니다. 달리는 내내, 흔들리는 내내, 지치는 내내,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바라봄의 대상이 바로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을 처음 들을 때만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마지막 날까지, 십자가는 우리가 서 있는 유일한 땅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진짜 고수들은 그 말을 듣고 낮아집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은 퇴보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