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가 2:1~7)
봄이 되면 들판 곳곳에 꽃들이 핍니다. 아무도 심지 않았는데, 아무도 물을 주지 않았는데, 그냥 피어납니다. 이른 아침 들판을 걷다 보면 그 꽃들이 스스로를 아름답게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답습니다.
아가서를 처음 읽었을 때 우리는 좀 당황스러워합니다. 이것이 정말 성경 안에 있는 글인가 싶을 만큼,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감각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쁘고, 함께 있는 자리가 잔치처럼 느껴지는 그 감정들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은 바로 그 날 것의 감정을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볕에 그을린 피부, 포도원에서 온종일 일하느라 거칠어진 손, 도시 여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투박한 모습입니다. 그녀는 아가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 흥미로운 고백입니다. 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그녀를 향해 노래합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조건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꾸면 어여쁘다"거나 "다음에는 더 예쁘게 입고 나와라"가 아닙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완전히, 어여쁩니다.
이 사랑을 받은 여인이 2장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이것은 허세가 아닙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 과잉도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볕에 탄 시골 처녀임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받은 사람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봅니다. 그 눈에는 자신이 넓은 들판의 수선화이고, 골짜기의 백합화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아내는 늘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거울 앞에 서면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남편과 외출할 때면 한 시간씩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했습니다. 남편의 눈에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때 나 정말 별로였는데." 남편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때 네가 제일 예뻤어. 지금도 예쁘지만." 아내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진심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초라했던 자신을 남편은 예쁘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내가 달라졌습니다.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외출 준비가 가벼워졌습니다. 남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하는 불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서가 말하는 자유입니다. 남자는 여인을 향해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의 이미지를 잠깐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가시나무는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황량하고, 찌르고, 거칩니다. 그 한가운데 백합화 한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누가 그 꽃을 가꾼 것이 아닙니다. 꽃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려 노력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거기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화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림을 완성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붓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합니다. "다 됐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제가 여기 조금 더 칠해드릴게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화가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완성된 그림에 손대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훼손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이미 완전하고 어여쁜 존재로 여겨지는데, 거기에 무언가를 더 갖추어 사랑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3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늘에 앉아 기뻐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주어진 그늘 안에서 쉬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달콤한 열매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건네주는 손에서 받아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믿는 사람뿐입니다.
4절은 더 나아갑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잔칫집은 왕이 베푼 자리입니다. 본래 그 시골 처녀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녀가 자격을 갖추어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끌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녀가 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의 손을 잡고 따라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믿음이 충분하면 사랑받고, 충분하지 않으면 덜 사랑받는다. 기도를 많이 하면 응답받고, 게으르면 응답이 없다.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실수하면 멀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래입니다. 성과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계약 관계입니다.
그 관계 안에 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에게 안식이 있을까요? 기쁨이 있을까요? 항상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 더 해야 한다는 강박, 혹시 자격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안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늘에 앉아 쉬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늘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의 여인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볕에 탄 것을 압니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내 위에 깃발이라고 당당하게 노래합니다.
5절에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사랑병, 이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밥을 먹어도 사랑 생각, 잠을 자려 해도 사랑 생각, 이것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과분하고 넘치는지를 알게 될 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싶은 감격이 밀려옵니다. 이 감격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감격,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6절은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줍니다.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이 장면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안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안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7절에서 여인은 예루살렘 딸들에게 부탁합니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이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깨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쉼을, 이 안식을, 이 기쁨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너 그렇게 쉬어도 돼?"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런 목소리들이 사랑의 안식을 흔듭니다.
여인은 그것을 막으려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 부탁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이 사랑 안에서 쉬는 것을 허락하십시오. 그늘에 앉아 기뻐하는 것을 빼앗지 마십시오. 사랑받기 위해 증명하라고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요구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잔칫집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준비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더 이상 거무스름한 시골 처녀로만 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분의 눈으로 자신을 봅니다. 그 눈에는 내가 수선화이고, 백합화이고,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난 꽃입니다. 온전하고, 어여쁘고, 부족함 없는 신부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번 내려놓아 보십시오.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더 사랑받으려는 안간힘을, 그냥 안겨 보십시오. 그 그늘에 앉아 보십시오. 그리고 이미 건네진 열매를 맛보십시오.
황홀하게 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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