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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아가

아가(05) - 사랑받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4.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아가 1:12~17)

어릴 적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의도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분명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드는 날이면 우리는 늘 현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이 숫자를 보고도 어머니는 나를 똑같이 사랑할까?' 그 질문은 아이였던 우리가 품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사랑이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나를 보고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자주 봉사하고,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사랑받을 자격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삼백 데나리온, 즉 보통 사람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향유는 여인이 자신의 몸에 바르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을 자신에게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꾸미기 위해 아껴두었을 법한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 앞에 아낌없이 부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여인에게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그 어떤 말보다 분명한 고백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왜 그랬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녀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죽은 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 삼백 데나리온짜리 향유조차도, 생명이신 그분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 압도된 사람의 응답이었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는
"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느냐"며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표면만 보면 그럴듯한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요한은 냉정하게 기록합니다. 유다는 돈 궤를 맡고 있던 사람이었고, 거기서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존귀함보다 자기 배를 채우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설령 유다가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선행에 가치를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팔아 좋은 일을 하면 더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는, 결국 내가 한 선한 행동이 나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유다가 있습니다. 믿음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믿음으로 내가 얼마나 유익을 얻느냐에 관심을 두는 유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기보다 그 사랑이 나를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느냐를 계산하는 유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정작 사랑 자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가서 12절을 보면, 왕이 침상에 앉아 있습니다. 그 곁에 여인이 있고, 여인의 나드 기름이 향기를 뿜어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향기가 아닙니다.
'왕의 침상'이라는 공간입니다. 왕의 침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왕이 사랑하여 허락한 자만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여인이 그곳에 있는 것은 여인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능력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다. 오직 왕의 사랑 때문입니다.

자격 없이 왕의 침상에 들어온 여인, 그 압도적인 사랑 앞에서 여인의 나드 기름은 자연스럽게 향기를 뿜어냅니다. 향기를 내기 위해 여인이 특별히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향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여인은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생각해보십시오. 여인의 품에 향주머니가 있다면, 여인이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따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향주머니 자체가 이미 향기를 내뿜고 있으니, 여인은 그저 그것을 품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그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랑 자체가 향기이고 존귀함입니다. 자신을 더 신앙인답게 보이기 위해 선행을 쌓고 종교적 열심을 더하는 것은, 가슴에 이미 향주머니를 품고 있는 사람이 인공 향수를 뿌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때 새벽기도를 빠지면 하나님께 무언가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봉사를 덜 하면 내가 덜 사랑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 모든 불안 뒤에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 '내가 잘해야 사랑받는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였습니다. 사랑을 향한 응답이 아니라 사랑을 획득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아가서 15절에서 왕은 말합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두 번 반복된 '어여쁘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특별히 잘 차려입었을 때 건네는 말이 아닙니다. 여인의 어떤 모습을 보고도 왕이 건네는 말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여인이 향유를 바르든 바르지 않든, 머리를 곱게 빗었든 아니든, 왕에게 여인은 언제나 '내 사랑'인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더 많이 가져도, 더 높이 올라가도,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도 우리 안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갈증을 채우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아"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 저주받아 마땅한 자리에서 나를 이끌어내어 생명 안으로 데려온 그 사랑,
16절과 17절의 장면은 이렇게 끝납니다. 침상은 푸르고, 집은 백향목 들보와 잣나무 서까래로 지어져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충만합니다. 기쁩니다.

그 기쁨은 여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왕의 사랑이 여인을 그 자리로 데려왔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충만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수준은, 우리가 경험해온 사랑의 수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에도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더 나은 내가 되어야 더 많이 사랑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가서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여인을 침상으로 이끈 사랑, 향주머니처럼 품에 안겨 스스로 향기가 되어주는 사랑, 어떤 모습이어도
"내 사랑아"라고 부르는 사랑,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압도되어, 마리아처럼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쏟아버리게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