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가 1:3)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오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나한테 잘해줄 때만 사랑받는 것 같아. 선물을 끊으면 사랑이 식은 것 같고, 연락이 뜸해지면 버림받은 것 같아." 친구는 한참을 듣다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는 그 사람의 사랑을 사랑하는 거야,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그 질문 앞에서 여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는 가장 근본적인 오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자체보다 사랑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들에 먼저 눈을 돌립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나를 향한 눈빛, 내 삶이 조금 더 편안해지는 것, 그것들이 충족될 때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그것들이 사라지면 "사랑이 끝났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물만 보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의 노래는 그래서 특별합니다. 그녀는 사랑받아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노래합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그녀가 주목한 것은 자신이 받은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 자체의 아름다움과 향기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처녀들이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사랑이란 나만 독점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사랑은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좁은 사랑이 아니라,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랑이기에 모든 이가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지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고국에서 온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곳에서 살아가는 게 신앙 때문입니까, 아니면 사명감 때문입니까?" 선교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분의 사랑이 너무 아름다워서 여기 있습니다. 제가 뭔가를 이루려는 게 아닙니다."
방문객은 그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문득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본질'을 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고, 병이 낫거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이 꼬이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면, 조용히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이것은 마치 선물이 없으면 사랑이 식었다고 느끼는 여성의 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10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서 확증되었는지를 명확히 밝힙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형편이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속하신 것, 바로 그 십자가에서 확증된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완성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기초로 삼은 사람은 형편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의 증거를 매일의 환경 속에서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5장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왕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미 옷을 벗고 발을 씻은 후였습니다. 귀찮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 여는 것을 망설입니다. 마침내 결심하고 일어났을 때, 사랑하는 이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여인의 솔직한 민낯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자보다 자기 몸의 편안함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나의 안위, 나의 성공, 나의 평판이 더 자주 마음의 중심에 놓입니다. 이것을 부끄러워하며 가리려 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들여다보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우리에게 사랑이 먼저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도망칠 것을 아셨으면서도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던 우리를 먼저 택하여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이유는 언제나 우리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살아서, 더 선하게 행동해서,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사랑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발상인지는, 이미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 앞에 설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검으나 아름답다." 검다는 것은 볕에 그을린 피부, 낮은 신분, 사랑받기 어려운 조건을 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왕의 사랑이 그녀를 아름다운 자로 여기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이 그녀를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녀를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존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때로는 비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자로 여김을 받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인위적으로 꾸미려는 강박에서 벗어납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으려고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의 이유가 나에게 있지 않으니, 나의 부족함이 사랑을 빼앗아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을 진심으로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단 하나입니다. "주의 사랑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성도의 고백이며, 술람미 여인이 불렀던 그 사랑 노래의 정수입니다. 왕의 이름만 불러도 향기롭다는 여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향기로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예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고, 검어서 못생겨도 괜찮은 사랑이며, 형편이 좋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씀 묵상 > 아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가(05) - 사랑받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0) | 2026.02.24 |
|---|---|
| 아가(04)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 (0) | 2026.02.24 |
| 아가(03) - 숨어 계신 하나님의 사랑 (0) | 2026.02.24 |
| 아가(01) -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 (0) | 2025.12.08 |